능산리 고분

능산리 고분

[ 扶餘 陵山里 古墳 ]

지역 부여
부여 능산리 36호분 구조

부여 능산리 36호분 구조

부여 능산리고분 전경

부여 능산리고분 전경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 15번지 일대에 분포하는 백제 후기의 대형고분군이다. 부여읍의 능산리 지역은 백제 말기의 왕릉지역으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 부여 읍내에서 논산쪽으로 약 1㎞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고분군은 모두 3개의 군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들 3개의 고분군은 왕릉으로 전하는 고분을 중심으로 동서고분으로 불리고 있는데 왕릉지역의 사적으로 지정된 곳에 7기의 고총이, 동서고분군에 5기, 그리고 서쪽에 수 기가 분포되어 있다.

이들 고분에 대한 조사는 1915년부터 발굴조사가 실시된 이후 계속해서 고분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최근에는 부근에 백제고분의 모형관을 설치하여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능산리의 고분들은 백제의 왕릉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이 왕릉임을 알려주는 내용이 공주읍지에 실려 있다. 이것은 이 지역의 지역명이 ‘능뫼’라고 불리고 있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능산리 고분군은 현재 7기의 고분이 정비되어 있다. 조사가 이루어진 것만도 1915년의 5기, 1917년의 5기, 그리고 1937년에 5기이며, 이후 1960년대에 추가로 수 기가 조사되어 현재 이 지역에서 조사된 것만도 수십 기에 이르고 있다. 1915년 일본인 黑板關野에 의하여 조사된 고분 중 동하총(東下塚), 중상총(中上塚), 서하총(西下塚) 등으로 불리는 고분이 유명하다.

이 가운데의 동하총에서는 벽화가 발견되어 유명한데, 고분은 밑변이 27m이며, 치석(治石)한 석재 혹은 깬돌(割石)로 2-3단의 기저를 돌리고 있다. 널방(玄室)은 단면 4각형의 모습인데 길이, 너비, 높이가 3.25×1.51×1.94m의 규모이다. 그리고 바닥에는 널받침(棺臺)을 설치하였다. 동서의 벽면은 연마한 거대한 1매의 판석으로 가설하였으며, 천장도 1매의 판석으로 덮고 있다. 이들의 벽면에 그려진 벽화는 북벽에는 현무(玄武), 남벽에는 주작(朱雀), 동벽은 청룡(靑龍), 그리고 서벽에는 백호(白虎)가 그려졌고, 천장에는 연꽃과 운문(雲文)이 그려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보존상태가 불량하여 자세하게 그 모습을 알 수 없다. 남벽에 설치된 널길(羨道)은 지상에서 2단 정도 낮게 설치되어 있는데 널방의 입구는 1매의 돌로 폐쇄하였고 또한 널길의 입구는 0.3m의 돌로 폐쇄하고 있다.

중상총은 치석된 석재로 고분의 단면이 6각형이 되게 꾸민 것인데 이 고분도 조사 전에 이미 도굴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전한다. 돌방의 규모는 3.25×1.45×1.7m의 규모이다. 크기는 동하총보다 약간 작지만, 횡단면이 6각형이 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다. 널길은 1.1m의 길이에 널방과 널길을 판석으로 막고 있다. 4호분은 3호분에서 북으로 25m의 거리를 두고 있는데 이미 표토가 유실되어 겨우 봉분이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이 4호분은 이 지역 가운데서 규모가 가장 크다. 내부의 주체인 널방, 널길을 석축하고 이의 전면에 긴 통로가 개설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통로부분을 보면, 널방에서 6m의 전반부분에서 지반을 판 통로가 시작되다가 깬돌로 벽면을 구축한 부분이 있는데 길이는 1.5m의 간격이며, 이곳에서 입구까지 2.3m의 간격은 판석을 세워 꾸미고 있다. 널방은 긴 벽은 3판, 북벽은 1판의 판석을 세워 수직벽을 올리고 그 위에 귀접이 형태로 3단의 장대석을 쌓은 다음, 천장석을 올리고 있다. 한편 널방의 바닥은 화강암질의 생토면에 배수구 시설을 꾸미고 있는데 널방의 벽면에는 점토를 바른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 고분의 널방 규모는 3.0×1.73×2.0m의 크기이다. 그리고 유물은 조사 이전에 이미 도굴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지 관재, 철정, 금박편 약간 등이 수습되었을 뿐이다.

5호분은 2호분에서 북으로 30m의 거리를 두고 있으며, 남아있는 봉분의 형태는 미미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무덤의 유구는 지표 아래 약 3.4m의 위치에 조영되었다. 완전 지하식으로서 굴식(橫穴式)에 단면 6각형의 양식이다. 널방의 규모는 2.77×1.07×1.4m이다. 이 고분도 이미 조사 전에 도굴이 이루어져서 수습유물은 약간의 관재, 철정 등 뿐이다.

이상으로 조사된 능산리 고분은 현재 7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하에 매몰되어 있다. 더불어 현재 외견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15년에 조사된 것들이며, 이들도 후대의 정비에 의해서 봉분의 규모는 크게 달라졌다. 참고로 이 고분들에 대한 봉분의 확대공사는 1966년에 이루어진 이후 1972년에 수축공사가 있었으며, 이 과정 중에서 7호분이 8호분과 함께 발견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大正6年度古蹟調査報告書(朝鮮總督府, 1917년)
  • 昭和12年度古蹟調査報告書(朝鮮總督府, 1937년)
  • 百濟古墳硏究(姜仁求, 一志社, 1977년)
  • 扶餘 陵山里 古墳의 調査(洪思俊, 考古美術 7-3(68), 考古美術同人會, 196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