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고분

백제고분

[ 百濟古墳 ]

한강 이남의 한반도 중서부 일대에는 마한(馬韓)의 70여 개 소국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그 중에 백제국(佰濟國)이라는 소국의 이름도 나온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가 고구려계통의 이주민이 남하하여 B.C. 1세기대에 국가를 건설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백제의 지배세력이 남하하여 왕실이 교체된 것은 4세기경이라고 보기도 한다. 지배집단의 교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백제는 이른 시기부터 마한의 한 소국으로 출발하여 주변 세력을 통합하고 중앙집권화된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백제는 초기부터 고구려의 남하정책과 갈등을 빚어 왔으며 그로 인해 도읍을 2번이나 남쪽으로 옮기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충청과 전라지역의 마한 소국들을 통합하여 세력을 확대해 갔다. 서울 강남구 석촌동(石村洞) 일대에는 계단식돌무지무덤이 축조되어 있어 백제의 지배세력이 고구려 계통이라는 역사기록을 뒷받침해 주는데 그 하층에서는 각종 나무널(木棺) 계통의 무덤들이 발견되므로 이는 돌무지무덤이 출현하기 이전에 축조된 초기 백제 토착지배세력의 무덤으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백제 중심지의 고분과 주변 마한세력의 고분을 구분하여 보고, 제 지방의 고분문화가 결국 하나의 백제고분문화로 통합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기백제의 고분문화는 마한지역의 고분문화 속에서 그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이후 백제가 고대국가로 성장하면서 외래계 고분문화 요소, 즉 고구려계 돌무지무덤(積石塚), 남조(南朝)계 벽돌무덤(塼築墳), 그리고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등을 채택하면서 발전하게 되는 중심지의 고분문화는 주변 마한지역의 고분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전라지역과 같은 주변지역에서는 늦은 시기까지도 지방 세력의 고분문화 전통이 유지된다. 성인을 펴서 묻을 수 있는 대형 독널무덤(甕棺墓)이나 또는 장고형, 방대형, 삼각형의 봉분 형태는 전남지방에서 특이한 발전을 보이지만 점차 굴식돌방과 같은 백제 중심지의 고분문화요소를 흡수하게 되고 점차 지역적 전통은 소멸하게 된다.

초기 마한·백제지역의 무덤양식은 매장시설에 따라 나무널움무덤과 독널무덤이 주된 무덤양식이었다. 움무덤은 매장시설로서 나무널이나 덧널을 주로 사용하고 독널무덤은 매장시설로서 지하에 독널을 사용한다. 3-4세기대까지 마한·백제의 영역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무덤양식은 움무덤이다. 대개 덧널움무덤이 출현하면서 나무널움무덤은 소멸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마한·백제의 영역에서는 나무널움무덤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특징이다.

마한·백제영역 내의 움무덤군은 석촌동 하층 고분군, 천안 청당동·화성리, 청주 송두리·송절동·신봉동, 화순 용강리, 승주 요곡리 고분군 등이 있다. 특히 청주 송절동 고분군과 천안 청당동 고분군에서는 봉분의 외곽을 감싸는 도랑(周溝)이 확인되어 봉분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도랑이 돌려지는 형태를 통해 이러한 종류의 움무덤에는 방대형(方臺形)의 봉분을 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독널은 전남지역에서 가장 독특한 발전을 보인 매장시설이다. 이 지역에서 독널의 사용은 광주 신창동 유적의 예로 보아 적어도 초기철기시대까지 올라간다. 초기형의 독널무덤에서는 실생활용 토기를 널로 사용하였으며 봉분을 가지지 못하였던 것 같은데 성인을 매장하기에는 너무 소형이기 때문에 대체로 어린이나 유아를 위한 무덤형식으로 추측된다. 전남지역의 독널은 움무덤의 나무널이나 덧널과 함께 이 지역에서 독특한 발전을 보인 성토분구에 매납되는 매장시설로서 애용되었다.

영암 내동리와 만수리 유적에서 조사된 분구묘 내에서는 매장시설로서 나무널이나 덧널과 함께 독널이 많이 사용된다. 대개 4세기 이전의 이른 시기에 속하는 독널들은 선대와 마찬가지로 실생활용 토기를 널(棺)로 사용한 것이고 소형에 속하지만 이후에는 독널 전용으로 제작된 것이 사용된다. 그중에는 맞대어 놓았을 때 독널의 규모가 3m를 넘는 것이 있으며 특히 금동관(金銅冠)이 출토되어 유명한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 을(乙)호 독널과 같은 존재는 이 지역 한 정치세력의 수장묘(首長墓)로 독널이 쓰였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전남 지방에도 6세기 중엽경이 되면 서서히 백제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며 이 지역의 고분문화도 변질된다.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 나주 복암리 3호분이다. 이 고분은 전남지역 전통적인 분구인 방대형에 가까운 봉분 안에 새로운 매장시설인 굴식돌방(橫穴式石室)을 채용하고 그 돌방 안에 전용 독널 4개를 매장한 것이다.

한성시대 백제무덤양식 중 서울 강남구 석촌동과 방이동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방대형의 계단식돌무지무덤이 있는데 이는 백제 전기 지배세력의 무덤으로 이해된다. 석촌동 일대에 남아 있는 돌무지무덤 중에 규모가 가장 큰 것은 3호분이다. 동서 길이가 55m 가량 되고 높이는 4.5m이며 남아 있는 상태로 추정한다면 3단으로 축조된 계단식의 돌무지무덤이고 돌무지의 상부에 돌덧널(石槨)과 같은 매장시설을 만들었다. 확인된 돌덧널은 길이, 너비, 깊이가 2.0×1.5×0.8m로 무덤의 규모에 비해 워낙 소형이기 때문에 주된 매장시설로서 큰 규모의 덧널이 따로 존재하리라고 추측된다. 이외의 돌무지무덤으로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유역에는 기단(基壇)이 없이 축조된 원형 혹은 타원형의 돌무지무덤이 드문드문 분포한다. 서울지역에 계단식돌무지무덤이 무리를 이루어 분포하고 있는 반면 이들 외곽지역의 돌무지무덤들은 축조방식도 다르고 개별 무덤이 단독으로 분포한다. 원래 돌무지무덤이 예맥족의 고유무덤일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들을 축조한 세력집단은 백제의 지배세력과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다.

웅진천도 이후부터 백제는 벽돌무덤이나 굴식돌방무덤과 같은 외래무덤양식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게 되고 전라지역의 마한세력을 적극적으로 포섭함에 따라 백제의 중앙문화가 전라도 남부까지 확산된다. 웅진시대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무덤양식으로 벽돌무덤을 들 수 있다. 백제의 영역에서 발견된 벽돌무덤으로 공주(公州) 송산리(宋山里) 고분군에 있는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武寧王陵) 2기가 대표적이다. 당시 중국 남조(南朝)에서 지배층의 무덤양식으로 유행하던 벽돌무덤을 수용하여 웅진시대(熊津時代)의 짧은 기간동안 사용했던 것이지만 이후 마한·백제지역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축조기술에 많은 영향을 주어 백제고분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자못 크다.

우연한 계기로 발굴조사된 무녕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왕릉으로 길이(남북), 너비, 높이가 4.2×2.7×2.9m로 긴 터널형의 무덤방 남쪽 벽 가운데로 3.0×1.0×1.5m 가량의 널길(羨道)을 내었다. 무덤방 내부를 보면 입구쪽에서 한단 높게 하여 널받침(棺臺)이 마련되어 있고 이것의 동쪽 편에 왕의 나무널이 놓이고 서쪽에 왕비의 널이 안치되어 있다. 무덤의 벽은 연화문과 각종 기하문으로 장식된 문양전(文樣塼)을 세로 쌓기와 가로 쌓기를 교대로 하여 축조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벽감(壁龕)의 존재인데 북벽에 1개, 동서벽에 각 3개씩 속을 보주형(寶珠形)으로 파낸 특별한 모양의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고 그 안에 백자완을 넣어 두었다. 백제 전축분의 감실(龕室)은 등잔을 켜기 위한 시설인데 벽감의 존재는 고구려의 석실분이나 함안 아라가야의 석곽묘에서도 보이는데 각각 용도가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령 고구려지역 태성리(台成里) 2호분, 약수리 고분(藥水里古墳) 등의 벽감은 용도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함안 도항리 4·8호분의 대형 석곽묘의 벽감은 석곽의 천장과 벽면의 붕괴를 막기 위한 버팀목을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과 왕비는 모두 금제관식(金製冠飾), 금귀고리, 목걸이, 금동제신발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널길 입구 쪽에는 진묘수(鎭墓獸)로 불리우는 외뿔짐승(一角獸)이 돌로 만들어져 놓여 있고 그 앞쪽에 왕과 왕비의 묘지석(墓誌石)이 놓여 있다.

백제·마한의 무덤양식으로 후기에 가장 유행하는 것은 역시 굴식돌방무덤이다. 이 굴식돌방무덤은 웅진 천도 이전의 서울 강남지역에서도 발견된 예가 있지만 본격적인 축조는 웅진시대부터 시작되어 백제의 주된 무덤양식으로 독특한 발전을 보이게 된다. 이 굴식돌방무덤은 백제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전북·전남지역의 재지세력(在地勢力)에 의해서도 채용되어 이 지역에 오랜 전통으로 남아 있던 매장시설인 독널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마한·백제의 영역에서 굴식돌방무덤은 분포 상황에 따라 크게 3개의 지역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서울 강남구 가락동·석촌동·방이동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한강유역권, 둘째로 공주와 부여 일대을 중심으로 논산과 익산지역을 포함하는 금강유역권, 셋째로 장성, 나주, 함평, 무안, 영암일대를 포함하는 영산강유역권을 들 수 있다.

서울 강남 일대의 굴식돌방무덤은 직경 10-18m 가량 되는 원형의 봉토를 가지고 돌방 평면은 방형(方形)이나 장방형(長方形)이며 모두 남쪽벽으로 널길이 마련되어 있다. 이들 굴식돌방무덤은 백제의 영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출토된 유물이 거의 없어 연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다만 집안(集安) 일대의 고구려 굴식돌방무덤이 출현하는 시기나 낙랑의 영역에서 벽돌무덤이 돌방무덤으로 변화되는 단계의 연대를 4세기경으로 본다면 그 영향을 받아 한강유역에서 굴식돌방무덤이 출현하는 것은 그보다 약간 늦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그리고 이들 전기 백제의 지배자 집단의 무덤으로 한강유역에 존속한 기간은 웅진 천도 이후로 내려갈 것 같지 않으므로 4세기말에서 5세기 중엽경에 해당되리라고 추측된다.

서울지역의 ‘ㄱ’자형의 평면형을 가진 방형의 돌방무덤은 웅진 천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왕릉의 매장시설로도 사용된 것 같다. 여기에 웅진시대의 굴식돌방무덤은 구조적인 면에서 벽돌무덤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벽돌무덤의 영향으로 돌방무덤의 무덤방은 장방형의 터널모양으로 변화되고 널길을 남벽 중앙에 내는 방식을 취한다. 웅진시대의 돌방무덤이 더욱 계승 발전된 것이 사비시대 능산리 고분군의 돌방무덤들이다. 백제 고유양식의 돌방무덤이 가장 발전된 형태에 도달한 시점에서 고구려의 무덤벽화 요소를 받아들이게 된다. 특히 백제 중심지의 고분군인 능산리 고분군의 돌방무덤들은 그 축조기법상으로 주변지역의 돌방무덤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것으로, 물갈이한 화강암을 이용하여 터널형으로 정교하게 축조되어 있다. 백제의 중앙귀족의 전용무덤이었던 굴식돌방무덤이 웅진 천도 이후, 주변지역으로 확산된다.

특히 백제가 전북과 전남의 재지 세력집단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 나감에 따라 이 일대의 지역세력 집단의 지배층들은 기존의 독널분구무덤의 사용을 폐지하고 굴식돌방무덤의 채용이 적극 추진되었던 것 같다. 5세기 후반경부터는 금강하류역에 굴식돌방무덤이 나타나는데 그 중 금동제의 관모(冠帽)와 신발(飾履), 중국제 청자가 출토된 익산 입점리 1호분의 존재가 주목을 끄는데 무덤의 구조는 공주 송산리 4호분과 매우 유사하다. 영산강유역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독널을 매장시설로 하는 분구묘가 늦은 시기까지 지속되는데 5세기 말경이나 6세기 초가 되면 굴식돌방무덤이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수용되어 재지적인 전통과 혼합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중 광주 명화동 고분월계동 고분은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이라고도 하는 장고모양의 봉분을 가졌으며 봉분의 가장자리에 도랑을 파고 그 안쪽을 따라 원통모양의 하니와(埴輪)를 줄지어 묻어 놓았다. 장고모양의 봉분 형태와 하니와의 매장은 삼국시대 고분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것이며, 일본지역의 고분에서는 흔히 보는 요소이기 때문에 매우 흥미로운 자료이다.

금동신발이 출토된 나주 복암리 3호분은 장방형의 굴식돌방을 채용하였으나 봉분은 전통적인 방형이며 돌방 안에 4개의 맞댄독널을 안치하였다. 전남지방의 후기고분을 대표하는 매장시설로서 굴식돌방의 출현은 백제 중앙지배계층의 고분문화를 적극 수용한 결과로 볼 수 있지만 이 지역의 강한 전통과 융합되어 독자적인 고분문화로 전개됨도 인정된다.

참고문헌

  • 百濟 石室墳 硏究(李南奭, 學硏文化社, 1995년)
  • 百濟古墳의 硏究(姜仁求, 一志社, 197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