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동 유적

신창동 유적

[ 光州 新昌洞 遺蹟 ]

지역 광주

광주시 광산구 신창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적으로 지정된 철기시대 초기 유적이다. 1963년 서울대학교 발굴조사단이 조사를 실시해 4×28m의 범위에서 총 53기의 독널무덤(甕棺墓)을 확인했고, 국립광주박물관에서는 1992년 이래로 여러 차례 조사를 통해 토기가마, 환호(環濠), 밭, 주거지, 저습지 등 철기시대의 생산 및 생활·분묘 유구를 확인하였다.

이 유적은 극락강(極樂江) 쪽으로 뻗은 해발 약 200m의 산 중 서쪽의 산 북측 완경사면에 위치하는 해발 25~30m 정도의 저평한 3갈래의 구릉과 크고 작은 이 구릉 사이에 위치한 곡간충적지에 형성되어 있으며, 유적의 크기는 최대 너비 400m, 길이 800m 정도이다. 이 일대의 토질은 적갈색점토며 표토 밑에 황갈색층이 있고, 그 밑은 단단한 적갈색층으로 되어 있는데, 독널은 적갈색점토층에서 노출되었다. 그 깊이는 지표 아래에서 약 20~30㎝ 정도로 매우 얕다.

독널의 크기는 15~72㎝이며 대부분 30~50㎝가 주를 이루고 있다. 2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음식(合口式)인데 1기는 외독식(單甕式)이고, 다른 1기는 3개의 독널을 연결하여 매장한 세독식이다. 독널 자체를 보면 적갈색, 황갈색, 백갈색 등으로 양질의 점토에 석립이 많이 섞여서 거칠어 보이고 소성도는 낮아서 단단하지 못하며 물레를 사용하지 않았고, 기벽의 두께는 0.7㎝ 정도이다.

출토옹관과 토기

출토옹관과 토기

독널은 독(甕)과 항아리(감)로 나뉘는데, 독은 유경, 무경으로 구분되며 곡경과 직경이 있다. 독 중에는 좁고 돌출된 바닥을 가진 것이 있고, 좁은 바닥에 배가 부른 난형(卵形)이거나, 입술 외부에 단면삼각형의 점토띠(粘土帶)가 돌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독널의 방향은 기본적으로 동~서로 되어 있으며, 큰독이 대부분 동쪽에 놓여 있는 것으로 미루어 침향은 동침임을 알 수 있다.

여러 크기의 독널을 2개, 3개를 붙여서 사용한 것으로 보아 독널의 크기가 작기는 하지만 이들 독널을 세골장(洗骨葬)이나 화장(火葬)과 관련된 뼈항아리(骨壺)로 보기는 힘들며, 소아나 유아를 신전장(伸展葬)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머리가 놓여졌던 것으로 보이는 큰독쪽을 약간 높이고 있는 점, 독널의 너비가 좁아 어른을 굴장(屈葬) 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이러한 추정은 더욱 명확해 진다.

신창동 저습지 칠기 칼집 출토상태

신창동 저습지 칠기 칼집 출토상태

유물에는 부장품이 철편 1점, 편평력(扁平礫) 1점뿐이고, 외부에서 소형토기 수 점, 돌도끼(石斧) 1점, 돌화살촉(石鏃) 1점, 숫돌(砥石) 1점, 철편 2점 등과 동제검파두식(銅製劍把頭飾) 1점이 발견되었다. 신창리 유적의 독널은 무문토기의 전통을 이어 받은 것으로 소형의 독널이 대부분이었다. 이와 같은 독널은 후에 삼천포 늑도, 경주 조양동 및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저습지에서는 각종 칠기류·무구류·농공구류·칠용기·현악기·베틀부속구 등 다량의 목제유물과 민물패류, 인골을 비롯해서 선사시대 생활문화와 관계된 여러 자료, 그리고 벼껍질·탄화미·보리 등 곡물류, 오이씨·박씨 등 채소류가 출토되었다.

유적의 층위는 16개 이상으로 세분되며, 유물의 출토상에 따라 크게 3개 층으로 구분된다. Ⅰ기층은 흑갈색 유기물부식토층으로 맨 밑바닥은 뻘층(silt)으로 이루어졌다. 이 층위의 최대특징은 벼껍질 압착층의 존재이며 그 사이에 나무와 나뭇잎·각종 씨앗류·칠기를 비롯한 다양한 목제유물과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신창동 유적의 토양샘플 및 탄화미, 그리고 벼의 줄기에 대한 분석결과 본 유적에서 재배된 벼의 품종은 단립형(短粒型)으로 밝혀졌다. Ⅱ기층은 홍수퇴적물과 목탄 및 불탄흙 등 토기제작의 부산물이 함유된 점성이 강한 진흙층이 중심을 이루며, 그 사이에 황갈색 사질경화층과 갈색층, 회백색 재층, 그리고 검정 목탄재층이 겹겹이 얇게 삽입되어 있다. 출토유물은 두(豆)를 비롯한 점토띠토기가 주종을 이루며 탄화미·씨앗 등도 발견된다. Ⅲ기층은 유적의 최상부에 위치하며 퇴적토와 일부 경작시 이루어진 지형변경으로 교란된 층이다. 출토된 유물은 무문토기류와 함께 옹기·자기·와편 등 조선시대 후기의 유물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토기가마는 기존에 존재했던 환호(環濠)의 경사면을 이용한 것으로 가마의 내부에서는 다량의 무문토기와 방추차, 숫돌(砥石)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고배(高杯)와 옹(甕), 발(鉢), 시루 등 B.C. 1세기대 점토띠토기 단계의 전 기종(器種)이 발견되었다. 또한 저습지에서는 중앙 내에 위치한 3개소의 수로, 그리고 수로의 서쪽 구릉에서 직경 25㎝ 안팎의 대형 나무기둥으로 이루어진 추정 공방지가 확인되었다. 수로변에서는 직경 5~10㎝정도의 소형 말뚝열이 집중적으로 드러났다. 대형수로 양편에 말뚝이 위치하고 그 사이에 걸림목(橫木)이 놓여 있었는데 이것은 물을 이용하기 위한 시설로 추정되었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당시의 생활문화를 해명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다량으로 출토되어 당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농경문화의 실체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유적의 연대는 B.C. 100~A.D. 100년간에 해당되며, 전남지역에서 철기시대 초기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 광주 신창동저습지 유적Ⅰ(조현종·신상효·장제근, 국립광주박물관, 1997년)
  • 光州 新昌洞遺蹟-第1次調査槪報(조현종·장제근, 考古學誌4, 韓國考古美術硏究所, 1993년)
  • 新昌里 甕棺墓地(金元龍,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