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호

환호

[ 環濠 ]

창원 서상동(남산) 유적의 환호

창원 서상동(남산) 유적의 환호

선사시대 마을의 주변을 둘러싼 도랑을 의미하는 바, 도랑 안에 물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용어여서 환구(環溝)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견해도 있다. 환호(環濠)는 그 도랑의 깊이가 깊고 폭이 넓은 것에서부터 그렇지 아니한 다양한 사례가 있는데, 단면의 형태도 ‘ V ’자형, ‘ U ’자형 등 다양하다.

기원전 4500년경의 중국 신석기시대 후반기 씨안(西安) 빤포어유적(半坡遺蹟)에서 환호와 더불어 집자리〔住居址〕와 무덤 그리고 각종 도구가 출토되어 중국 신석기시대 환호마을의 생활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 큐슈(九州) 사가현(佐賀縣)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유적에서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까지 이르는 긴 기간 동안 사용된 대규모 환호마을유적이 조사되어 일본 야요이시대(彌生時代)의 사회분화양상과 문화적 특성을 보여준다. 요시노가리 유적에서는 대규모 환호유구와 밀집된 집자리, 분구묘(墳丘墓), 망루(望樓)와 고상창고(高上倉庫)로 추정되는 유구 등이 확인된 바 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환호마을로는 울산 검단리 유적, 울산 천상리 유적, 창원 서상동(남산) 유적, 부여 송국리 유적, 대구 동천동 유적, 진주 대평리 옥방1지구 환호마을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환호에는 토루(土壘)와 더불어 목책(木柵)도 함께 사용되기도 하는데 진주 대평리 옥방1지구 환호마을 유적이 그 예이다. 그리고 환호 안에 망루의 기둥구멍〔柱穴〕으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기도 하는데 청동기시대의 창원 서상동 유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환호에 대해서 주로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를 하기 위한 기능을 가졌다는 견해, 뱀이나 야생동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라는 견해, 환호가 둘러싼 마을을 그 외부와 구분하는 심리적·상징적 경계선이라는 견해 등이 있다. 환호는 본래 이러한 기능을 모두 수행했다고 여겨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기능 중 일부만 수행했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환호의 기능성과 상징성은 당시 사람들에 의해 다면적·누층적으로 파악되며 의미가 변화하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농경의 본격화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와 잉여생산물의 출현, 대규모 고인돌〔支石墓〕군과 차별화된 묘역(墓域)과 무덤의 축조, 청동기를 포함한 차별화된 위세품(威勢品)의 사용 등으로 특징되는 청동기시대에는 점차 지역별로 영향력 있는 수장(首長)의 등장이 암시된다. 이와 동시에 구릉성 및 고지성 마을의 등장, 돌화살촉〔石鏃〕과 돌검〔石劍〕 등 무기류의 등장 등은 당시 일정한 사회적 긴장상태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짐작케한다. 따라서 환호는 농경의 본격화와 심화 등을 경제적 토대로 하면서 사회분화가 진행되고 그 과정에서의 각종 사회적 긴장관계의 출현 속에서 만들어진 유구로 이해된다. (김권구)

참고문헌

  • 영남지방 청동기시대 환호취락연구(배덕환, 동아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