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동 유적

동천동 유적

[ 大邱 東川洞 遺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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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천동 유적 집자리

대구 동천동 유적 집자리

대구광역시 북구 동천동에 위치한다. 1993∼1994년 경북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칠곡 2택지 개발지구와 1997∼1999년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한 3택지 개발지구로 두 지점은 남북방향으로 약 500m 거리에 위치한다. 두 유적 모두 금호강의 북쪽 지류인 팔계천(八溪川) 동쪽 충적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삼국시대 마을유적이 함께 확인되고 있다.

칠곡 2택지 유적에서는 집자리〔住居址〕 4기가 조사되었다. 모두 평면 장방형계로 상태가 양호한 4호는 크기 1,000×380㎝로, 바닥 가운데 두 개의 기둥구멍〔柱穴〕 사이에 작은 납작 깬돌〔割石〕로 방형의 돌두름식〔圍石式〕 화덕자리〔爐址〕를 설치하였다. 동쪽 모서리부분으로는 ‘ㄴ’자형의 얕게 판 벽도랑〔壁溝〕이 있으며 사다리모양〔梯形〕 반달돌칼〔半月形石刀〕, 소형 대팻날도끼〔扁平偏刃石斧〕 등이 출토되었다. 4호와 7m 거리 내에 있는 다른 집자리들은 화덕이 없고 면적도 상대적으로 적어 4호와 관련된 집자리로 여겨지고 있다. 유물홈자귀〔有溝石斧〕, 대팻날도끼,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 등이 있다.

칠곡 3택지 유적은 집자리 60기, 고상가옥(高床家屋) 20기, 돌널무덤〔石棺墓〕 6기, 우물〔井〕 4기, 구덩유구〔竪穴遺構〕, 야외불뗀자리〔野外爐址〕, 물 모으는 시설〔集水場〕 2기, 구획된 경작지(耕作地), 환호(環濠) 등 200여 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대구 동천동 유적 출토유물

대구 동천동 유적 출토유물

집자리의 경우, 47기는 송국리형(松菊里型)으로 평면 원형, 말각 방형을 띠며 크기는 원형 3호가 375×335×43㎝이고 말각방형 8호는 360×325×43㎝이다. 바닥 중앙에 타원형구덩이〔娥圓形竪穴〕와 그 양 끝 바깥쪽에 기둥구멍이 있는 형태, 타원형구덩이가 없는 형태, 타원형구덩이만 있는 형태, 타원형구덩이가 기둥구멍보다 작은 형태 등 다양하다. 집자리들은 가운데 구덩이와 기둥구멍과의 연결선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시기적인 차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13기의 집자리는 평면 장방형과 방형으로, 크기는 장방형 50호는 310×725×15㎝이고 방형 38호는 440×320×25㎝이다. 화덕을 갖추고 있으며 중복관계로 보아 송국리형집자리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이다. 고상식의 건물지는 규모가 최고 10칸×2칸에서 최소 1칸×1칸까지 다양하여 그 기능에서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류와 석기류가 다양한데 대표적으로 바리모양토기〔鉢形土器〕와 붉은간토기, 짧은배모양〔短舟形〕·사다리모양〔梯形〕 반달돌칼, 홈자귀, 슴베있는간돌화살촉〔有莖式磨製石鏃〕 등이 있다.

구덩유구는 가장 많은 수가 조사되었는데 다양한 기능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평면형태나 내부상태로 보아 움무덤〔土壙墓〕으로 추정되는 16기, 내부에 화덕자리를 가진 것 5기, 소토나 목탄이 집중된 야외불뗀자리형이 8기, 제의(祭儀)적인 성격으로 보이는 것 11기, 작업시설로 보이는 것 4기 등이 있는데 각기 성격에 따라 그 분포양상에서도 차이가 있다. 특히 물 모으는 시설 주변에 입지한 3호나 옛 하천변의 4호·9호·10호는 그 형태의 특이성이나 입지상으로 보아 수변제사(水邊祭祀)시설로 추정된다. 그 외 석기제작장의 1호나 폐기장(廢棄場) 같은 5호에서는 토기류와 석기류 등의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우물은 2기씩이 짝을 이루어 4기가 조사되었는데 돌로 쌓아 돌린 형태로 단면은 아래가 좁고 위쪽으로 벌어지는 깔때기 형태를 하고 있다. 돌무더기 대부분도 물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돌널무덤은 집자리 분포지역을 둘러싸고 남쪽과 동쪽에서 6기가 확인된다. 가장 큰 2호의 경우 대형의 납작깬돌 4장으로 90×40㎝ 크기의 돌널을 만들고 다시 그 주변으로 돌덧널〔石槨〕을 돌렸는데 그 사이에 붉은간토기를 껴묻기〔副葬〕하기도 하였다. 돌널무덤은 장축방향이나 축조방식 등에서 차이가 있지만 마을의 주거구역을 의식하여 그 외곽에 만들었음은 확실하다.

주거구역의 남쪽으로는 경작지를 구획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방형, 장방형, 부정형 등으로 구획된 도랑유구〔溝狀遺構〕가 넓게 펼쳐지고, 서쪽으로는 폭이 최고 250m, 잔존깊이 70㎝인 환호가 남북으로 조성되어 있어 주거구역을 감싸고 있는 상황이다. 구획된 도랑유구의 남쪽으로는 다시 문화층이 낮아지면서 물을 모아 다시 내보내는 시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변에 당시 논〔水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천동 마을유적은 팔계천 주변에 넓게 형성된 칠곡분지 일대에서는 가장 큰 마을유적〔據點聚落〕으로, 밀집된 집자리와 고상가옥 외곽으로 우물과 제사시설, 돌널무덤 등의 2차적 주거시설들을 만들고, 그 외곽에 다시 경작지나 환호로서 마을의 경계를 삼는 등 당시 마을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방사성탄소연대치는 송국리형집자리인 20호가 2570±40 B.P.(보정연대 B.C. 790), 장방형인 50호가 2650±200 B.P.(보정연대 B.C. 800)이다. (유병록)

참고문헌

  • 대구 동천동 취락 유적(영남문화재연구원, 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