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부부총

양산 부부총

[ 梁山 夫婦塚 ]

지역 양산
부부총 평면모식도

부부총 평면모식도

경상남도(慶尙南道) 양산군(梁山郡) 양산읍(梁山邑) 북정리(北亭里)(현재 경상남도 양산시 북정동)에 소재한 대형봉토분이 밀집된 북정리 고분군 중에 발굴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으로 밝혀진 고분이다. 낙동강의 지류인 양산천 유역에 형성된 넓은 평야지대를 향하여 뻗어내린 능선 정상부을 따라 대형봉토분이 나란히 배치되는 양상을 보면 이 북정리 고분군은 가야지역의 일반적인 수장급 고분군 입지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 조사를 통해 북정리 고분군의 고분 호수가 매겨지고 그 중 10호분에 해당되는 것이 발굴 조사되었는데 이것이 양산 부부총이다.

당시 초보적인 발굴조사 기술수준으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매장주체부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고 부부가 합장된 것이라는 정도의 추측을 할 수 있었는데 1990년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정밀한 재조사를 거쳐 굴식돌방무덤이 아니라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임이 밝혀졌다. 또한 추가장 및 순장의 수행도 먼저 주인과 함께 1인, 뒤에 추가장으로 부인과 함께 2인이 순장(殉葬)되었던 것임이 밝혀졌다.

고분의 내부구조는 길이, 너비, 높이가 5.45×2.25×1.7m인 장방형(長方形) 앞트기식돌방인데 상자모양의 평천정 돌방이다. 입구는 서쪽 단벽을 6-7단 높게 헐어서 만들었으며 추가장이 이루어지고 난 뒤 돌방을 축조한 석재와 같은 크기의 돌로써 폐쇄하였다. 돌방의 중앙보다 약간 뒤로 후퇴하여 높이 80㎝ 정도의 주검받침대(屍床臺)를 만들었으며 입구 쪽에서 보아 오른편에 주인을, 왼편에 부인을 안치하였고 입구 쪽의 공간에는 순장한 시신이 나란히 3구 배치되었다.

부장품은 매우 화려하고 풍부한 편이다. 주인의 수지형입화식금동관(樹枝型立華飾金銅冠), 가는고리귀고리(細環耳飾), 은제허리띠(銀製銙帶)와 드리개(腰佩), 세고리자루큰칼(三累環頭大刀), 금동제신발(金銅製飾履) 등과 부인이 착용했던 백화수피제관모(白樺樹皮製冠帽), 굵은고리귀고리(太環耳飾), 목걸이(頸飾), 주인의 것과 비슷한 형식의 은제허리띠와 드리개도 출토되었다. 피장자의 머리맡 공간에서는 다수의 토기류와 함께 말안장(鞍가)과 말띠드리개(杏葉) 등이 출토되었다. 피장자의 발치쪽, 즉 입구부 가까운 쪽에서는 흔히 사행상철기(蛇行狀鐵器)라고 하는 것과 순장자의 시신 3구가 나란히 노출된 바 있다.

이 양산 부부총은 출토유물의 질과 양, 그리고 고분의 규모로 보아 낙동강 동안지역의 수장급 무덤으로 학계에서 공히 인정하고 있으며, 창녕(昌寧) 교동(校洞) 고분군, 대구(大邱) 달서(達西) 고분군, 경산(慶山) 임당동(林堂洞) 고분군 등의 수장급고분과 동일한 수준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 보고된 이래로 신라·가야지역 고분연구에 표지적(標識的)인 자료로서 활용되어 왔던 바이다. 그러나 이 고분의 축조연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어 왔다. 고분구조의 편년상 신라 지증왕(智證王) 3년(502)의 순장금지령(殉葬禁止令) 기사와 관련시켜 5세기 후반대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토기 편년상 신·고(新·古) 두 양식의 토기가 함께 매납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법흥왕(法興王) 때 금관가야의 신라복속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6세기 중엽에 가까운 시기로 편년하는 견해도 있다.

참고문헌

  • 梁山金鳥塚·夫婦塚(東亞大學校博物館, 1991년)
  • 梁山夫婦塚と其遺物(朝鮮總督府, 古蹟調査特別報告 5, 192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