껴묻거리

껴묻거리

[ 副葬品 ]

피장자를 장식하거나 사후세계를 위해 물품을 껴묻어주는 행위에 의해서 남게 된 것을 말한다. 즉 우선 피장자에게 옷을 입히거나 장신구를 달아주는 행위로부터 생전에 사용하던 물품을 함께 묻어 주기도 하며, 피장자의 신분이나 지위 또는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물품을 따로 만들어 매납하는 행위들이 고고학 자료로 남은 것이다.

성주 성산동 고분(부곽)

성주 성산동 고분(부곽)

인류사를 통하여 볼 때 매장의례와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는 지금으로부터 77000년 전 네안데르탈 단계부터 찾을 수 있으며, 껴묻거리의 기원도 그 무렵부터라고 이해된다. 이스라엘의 카프제(Qafzeh) 유적, 우즈베키스탄의 테쉭 타쉬(Teshik Tash) 유적, 이라크의 샤니다르(Shanidar) 동굴유적 등은 모두 네안데르탈 단계에 해당하는데 각각 사슴뿔과 타조알, 산양의 두개골, 꽃 등이 피장자와 함께 매납되었다고 한다. 후기구석기시대가 되면 보다 구체적인 껴묻거리의 증거가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러시아 모스크바 근처의 숭기르(Sungir) 유적에서는 피장자의 양쪽에 나무창을 묻어주고 상아로 만든 구슬과 여우의 치아로 피장자를 장식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매장의례를 수행한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은 꽤 여러 예가 발견된다. 이와 같이 특정인을 위해 특별한 매장의례를 행한 사례를 들어 후기구석기시대에 초보적인 계급분화의 증거로 채택하기도 한다. 신석기시대에는 농경사회를 거쳐 복합사회의 단계로 진화하면서 계급의 분화가 더욱 진행된다. 그에 따라 매장의례와 유물을 껴묻는 양상도 더욱 분화되고 다양화된다. 그래서 초기 문명지역에서는 신분과 권력을 상징하는 거대한 고분도 축조되고 최상위 왕묘를 정점으로 하여 하위묘에 이르기까지 고분의 규모와 껴묻거리의 질과 양에 있어서 위계화된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매장의례의 관념이 시기적으로 변하게 됨에 따라 껴묻거리의 종류와 내용이 달라지므로 껴묻거리의 시기적인 변화는 직접적으로 고분편년의 자료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사회의 변동을 검토하기도 한다. 그리고 동일한 시기에 있어서도 피장자의 신분이나 직업에 따라서 껴묻거리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 차이를 가지고 피장자의 사회적 지위나 역할을 추론하기도 한다. 우선 사회가 진화되면서 계급이 분화되고 정치권력이 성장함에 따라 상위고분의 껴묻는 유물이 더욱 확대되고 고분의 위계화도 심화될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고등종교가 사회의 이념으로 자리잡으면 현실의 권력보다는 내세 영적 가치를 존중하게 되어 매장의례가 축소되고 껴묻거리도 줄어드는 현상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껴묻거리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장유물이 지닌 기능적 혹은 상징적 의미에 따라 나누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껴묻거리가 가진 의미는 유물 그 자체가 함의하고 있겠지만, 유물이 껴묻어 있는 위치와 출토맥락에 따라서도 달라질 것이다. 한반도 선사·고대의 분묘에서 껴묻거리의 종류와 양, 혹은 부장위치와 순서 등이 일정한 유형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물론 청동기시대부터이지만 삼국시대가 되어야 껴묻거리의 상징적 의미가 체계화된다. 우선 유물을 껴묻는 양상에서 껴묻거리의 종류와 위치에 주목하게 되는데, 삼국시대 고분의 경우에 다음과 같이 유형화될 수 있다. 첫째는 피장자의 신변에 소지하는 것, 둘째는 피장자의 사후세계를 위해 일정한 공간이 배려되어 격납되는 것, 그리고 셋째는 묘지 제사를 위해 매장시설 주변에 공헌되는 것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신변유물은 피장자가 차고 있거나 널 안에 매납되었는데, 주로 피장자의 신분과 같이 사회적인 정체성을 상징하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관모(冠帽), 신발, 허리띠, 목걸이 및 기타 장신구와 도검류(刀劍類) 등이 있으며, 이들 유물의 종류와 그 유무에 있어서 상·하위 고분의 위계에 따라 매우 규칙적으로 등급화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후세계를 위해 제공되는 유물은 흔히 시신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머리맡이나 발치 혹은 딸린덧널(副槨) 등 일정한 공간이 마련되고 그 장소에 매납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복천동(福泉洞) 고분군에서 출토된 덩이쇠(鐵鋌)나 합천(陜川) 옥전(玉田) M3호분에서 출토된 주조쇠도끼(鑄造鐵斧)와 같이 시신 혹은 널 밑에 깔아 놓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껴묻거리는 보통 1점씩 매납되지 않고 복수로 껴묻게되고 상위 신분의 고분일수록 그 양은 큰 폭으로 늘어난다. 다시 말하면 상·하위고분의 위계(位階)에 따라 껴묻거리의 종류나 유무가 크게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껴묻는 양에 따라서 고분이 등급화된다는 점이다. 이런 종류로서는 삼국시대 고분에 토기를 비롯한 용기류(容器類)를 껴묻은 것이 대표적이며, 2-4세기대 진·변한(辰·弁韓) 일부 지역 덧널무덤(木槨墓) 등에 발견되는 판상쇠도끼와 쇠투겁창류(鐵矛類), 4-5세기대 여러 다발의 화살촉이나 투겁창과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양보다는 부피가 크거나 실제 피장자가 착용하기 어려운 유물, 즉 갑옷과 투구 등의 방어무기류(防禦武器類), 농공구류(農工具類), 마구류(馬具類) 등도 있다.

이러한 유물을 껴묻은 것은 사실 피장자의 경제적인 통제력 혹은 권력을 상징적으로 표상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끝으로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에는 장례시 현장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공헌되는 유물이 있다. 예를 들면 고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봉분에는 봉토를 쌓으면서 제사를 지내고 각종 토기나 마구류를 매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라·가야지역 무덤도랑이나 고분 주위에 제사지낸 토기를 깨거나 온전히 매납한 것도 보인다. 백제고분의 경우 무녕왕릉(武寧王陵)의 벽감에는 무덤방(墓室)을 밝히기 위한 등잔이 발견되었으며, 송산리(宋山里) 4호분처럼 무덤방안에 휘장을 쳤던 못과 같은 것도 있다.

한반도 선사시대에 있어서 매장의례와 관련된 고고학 자료는 신석기시대부터 보인다. 신석기시대 늦은 시기로 편년되는 춘천 교동(校洞) 동굴에는 시신과 함께 토기 몇 점과 간돌도끼(磨製石斧)가 발견된 일이 있다. 울진 후포리(厚浦里) 유적에서는 여러 명을 함께 매장한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돌의 결을 살려 미려한 형태로 제작된 대형 간돌도끼 130여 점을 껴묻었다.

부장품의 종류와 양이 유형화되고 무덤의 등급이나 시기에 따라 규칙적인 변화를 보여주기 시작하는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이다. 비파형동검단계(琵琶形銅劍段階)의 고인돌이나 돌널무덤(石棺墓)에서는 비파형동검이나 동모(銅矛)·동촉(銅鏃) 중의 한 두 점, 간돌검(磨製石劍)이나 간돌화살촉(磨製石鏃), 붉은간그릇(紅陶), 대롱옥(管玉)과 굽은옥(曲玉) 등의 부장품조합이 유형화된다. 그리고 청동기나 옥의 유무에 따라서 분묘들이 등급화된다. 이후 세형동검단계(細形銅劍段階)의 움무덤계통의 무덤에서는 껴묻거리 조합이 좀 늘어나고 그 등급도 세분되고 뚜렷해지는 편이다. 세형동검, 기타 청동무기류, 기하문동거울(幾何文銅鏡) 및 각종 청동의기류(靑銅儀器類) 등의 껴묻거리 조합이 보다 정돈되고 위계화가 현저해진다.

원삼국시대가 되면 고구려지역(高句麗地域)의 초기 돌무지무덤(積石塚), 마한·백제지역(馬韓·百濟地域)의 널무덤·덧널무덤과 독널무덤, 진·변한지역(辰·弁韓地域)의 널무덤·덧널무덤 등 매장시설에 있어서도 지역적 특성이 잘 드러나지만 부장품에서도 제 지역간의 대비가 뚜렷해진다. 그와 아울러 하나의 단위사회 내에서도 부장양상의 다양성 및 위계화가 더욱 현저해지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이때부터 낙랑을 통해 한문화(漢文化)의 영향이 매장의례에도 크게 미치게 되고 부장품의 종류에도 반영된다는 점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의 경우 원삼국시대 초기까지 청동무기류를 지배자집단의 무덤에 껴묻게되나 철제 무기류, 농공구류 등으로 바뀌어지게 된다.

용기류에 있어서는 고인돌 축조시기의 붉은간그릇이나 초기철기시대 검은간그릇의 목항아리와 점토대토기를 껴묻는 전통이 유지되어 원삼국시대 초기 분묘에도 토기류를 한 두 점 정도 껴묻게되고 칠기류(漆器類)가 동반되는 예가 많다. 그러나 원삼국시대 초기까지는 지배자의 분묘라 하더리도 널무덤이라는 매우 협소한 매장시설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용기류와 같이 부피가 있는 유물을 여러 점씩 껴묻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상위의 분묘에는 권위의 상징물로서 청동제 무기나 의기류 대신 낙랑으로부터 분배된 것으로 보이는 위세품(威勢品)이 매납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원삼국시대 후기가 되면 고구려와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일대에는 덧널무덤을 매장시설로 채택한다. 덧널무덤의 사용으로 껴묻거리의 양이 확대되는 것인지, 아니면 껴묻거리의 양을 확대하기 위하여 덧널무덤를 채용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우나 이시기부터 동종(同種)의 껴묻거리를 복수부장(複數副葬)하는 방식이 나타난다.

삼국시대가 되면 유물을 껴묻는 의미가 체계화되어 다양화된 껴묻거리의 목록이 정비된다고 할 수 있다. 껴묻거리의 종류와 양은 시기적으로 서서히 변화를 보여주며 또한 고분의 등급에 따라서도 차별화된다. 이들 유물의 종류가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 삼국의 제 지역에 따라 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삼국간의 문화적인 교류로 인하여 상당한 공통성을 띠고 있기도 하다. 확실히 매장의례의 관념은 삼국의 제 지역에 따라서도 다르고, 제 지역의 사회변동에 따라서도 변화되기 때문에 껴묻거리의 내용도 지역과 시기에 따라 큰 변화를 보여준다. 고구려의 고분은 이미 대부분 도굴되어 버린 탓도 있지만 이 지역에서는 많은 유물을 껴묻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유물이 출토된 고분에서도 간단한 장신구와 무기 그리고 몇 점의 토기들이 상징적으로 매납될 뿐이며 같은 종류의 유물이 대량 매납된 예는 없다.

백제지역도 유물을 다량으로 껴묻지는 않았다. 도굴된 바 없이 발굴된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매우 화려하고 수준 높은 것이지만 신라고분처럼 다량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무녕왕릉의 유물들은 기본적으로 신변유물 혹은 피장자의 신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 대부분이고 사후세계를 위해 용기류, 무기류 등을 다량 매납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는 고분문화지역은 역시 신라·가야지역이며 그 중에도 신라지역의 왕묘라고 할 수 있다. 신라고분에서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는 이유 중에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라는 구조 자체가 도굴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유물 중에도 용기류와 무기류 기타 철기류들을 그 의미에 따라 상징적으로 한 두 점씩 껴묻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덤에 껴묻기 위해 엄청난 양의 유물을 생산하고 매납한 것이다.

껴묻거리의 내용이 시기적으로 변천하는 과정은 신라·가야고분에서 잘 살필 수 있다. 고구려나 백제지역의 고분에서는 껴묻거리의 내용이 신라·가야지역에서 만큼 시기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변천의 양상도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신라·가야고분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유물 내용의 변천과정은 3단계 정도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첫째로 원삼국시대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덧널무덤단계이다. 이 시기에는 신변유물이나 소형유물들을 소량 껴묻게되고 같은 종류의 유물을 다량으로 껴묻어주지는 않는다. 특히 토기와 같이 용적이 큰 유물은 한 두 점 껴묻는데 그치며 매장시설 내에 껴묻기보다는 널(棺)위나 널을 고정하기 위해 측면에 채워놓은 흙 위에 껴묻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덤구덩이를 널빤지로 덮고 그 위에 껴묻기도 한다. 용기류를 이와 같이 껴묻는 이유는 물론 나무널이라는 매장시설에서는 공간을 넓게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는 권력 혹은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로서는 청동제 혹은 철제무기류와 같은 것도 있지만 한군현(漢郡縣)으로부터 분배된 거울(銅鏡)과 같은 유물이 중요시된다. 철제 농공구류나 무기류 등을 종류별로 한 두 점씩 매납하고 칠기와 토기 등을 소량 껴묻게되는 것은 지배권력의 다기능성(多機能性)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제2단계는 원삼국시대 후기인 2세기 중엽 덧널무덤이 출현하는 시기로부터 고총고분이 본격화되고 굴계(橫穴系)묘제가 확산되기 시작하는 5세기 중엽 경까지로 설정할 수 있다. 제2단계에 들어서면 체적이 큰 매장시설인 덧널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껴묻는 유물의 양이 늘어난다. 초기형의 덧널무덤에는 토기류를 껴묻는 것이 극히 제한되고 철기류를 껴묻는 것이 갑자기 늘어나는 것으로 보아 덧널무덤은 철기류의 부장을 위해 축조되는 듯하다. 3세기대에 들어와서 토기류를 많이 껴묻기 시작하고 3세기 후반부터는 용기류 매납을 위해 딸린덧널(副槨)을 따로 축조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토기류를 중심으로 한 용기류를 껴묻는 것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중요시되는 전통이 3세기 대부터 마련되는 것 같다. 3세기대를 거치면서 철제무기와 철소재류 등의 철기류와 토기를 중심으로 한 용기류가 특정 상위분묘에 다량 매납되는 현상이 심화된다.

다량 매납이란 같은 종류의 유물을 양적인 면에서 과시하기 위해 복수로 껴묻는 방식을 말한다. 4세기 대부터는 마구류와 갑옷·투구류 등 일종의 전쟁수행용 물품이 중요한 껴묻거리가 되고 토기류도 전문 공인집단에 의해 생산된 회청색경질토기류가 다량 매납되기 시작한다. 상위계급에 껴묻거리로 중요시되는 유물을 껴묻는 것은 덧널무덤단계로부터 서서히 변한다. 2-3세기 대까지는 한군현으로부터 입수된 유물을 권력의 상징물로서 껴묻게되지만 점차 철제무기류를 다량으로 껴묻는 데에 비중을 많이 두는 것이다. 김해와 같이 지리적으로 대외교역에 유리한 지역의 중심고분군인 대성동(大成洞) 고분에서 만큼은 4세기 대에 여러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이국적 유물(異國的 遺物)을 많이 껴묻는 현상은 특기할 만하다. 이점은 교역의 본질에서 차이는 있을지라도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의 상당량이 남조(南朝)로부터 수입되었다는 사실과 비교될 수 있다.

5세기대 들어서면 금·은·금동으로 장식된 무기·마구·장신구 등 신분을 상징하는 호사스런 유물이 상위고분에 집중된다. 따라서 전시대에 중요한 껴묻거리였던 철제무기나 용기류들을 지속적으로 껴묻기는 하지만 그 중요성은 금공품에 밀리게 된다. 즉 왕묘에서 철제 실용무기들이 다량 출토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장식큰칼(裝飾大刀) 한 두 점을 껴묻는 것과 비교될 수는 없다. 비단 무기류뿐만 아니고 관모, 귀고리, 신발 등과 같은 장신구류나 발걸이, 안장, 말띠꾸미개 등과 같은 마구류 등의 유물도 그것을 다량 껴묻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금·은·금동 등의 장식이 어느 수준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 시기는 상·하위 고분 사이에 껴묻거리 내용의 격차가 가장 심화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고, 특히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사이의 시기가 최고위 고분에서 유물을 껴묻는 것이 극대화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6세기 전반경 이후부터는 껴묻거리 내용이 현저하게 소박해지고 유물도 소형화되거나 일종의 명기화되는 경향이 농후해진다. 이점은 경주지역을 제외한 신라·가야 전지역의 고분이 축소되고 때로 소멸되어 가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참고문헌

  • 百濟石室墳硏究(李南奭, 學硏文化社, 1995년)
  • 新羅古墳硏究(崔秉鉉, 一志社, 1992년)
  • 고분(김기웅, 대원사, 1991년)
  • 古墳時代の硏究古墳Ⅱ副葬品(石野博信 外 編, 雄山閣, 1990년)
  • 韓國考古學槪說(金元龍, 一志社, 198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