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옷과 투구

갑옷과 투구

[ 甲胄 ]

판갑옷:합천 옥전 M28호. 높이 92.0cm

판갑옷:합천 옥전 M28호. 높이 92.0cm

傳 김해 퇴래리. 높이 64.8cm

傳 김해 퇴래리. 높이 64.8cm

적의 공격으로부터 인체를 보호하기 위하여 착용하는 대표적인 방어용무구(防禦用武具)이다. 머리에는 투구를, 몸에는 갑옷을 입었다. 철제갑옷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나무로 된 나무갑옷(木甲)과 가죽으로 된 가죽갑옷(皮甲)의 존재가 예상되지만 그 실물자료는 아직 예가 없고, 다만 몽촌토성(夢村土城)에서 출토된 뼈갑옷(骨甲)이 있다.

한국의 삼국시대 갑옷의 원류는 기존의 전통적인 갑옷문화와 중국대륙의 갑옷문화가 서로 융합한 독자적인 갑옷문화의 기반 위에 북방의 기승용(騎乘用) 갑옷문화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갑옷은 크게 여러 가지 모양의 철판을 이어 만든 판갑옷(板甲)과 작은 철판(小札)을 가죽으로 엮어 비늘처럼 만든 비늘갑옷(卦甲)으로 나누어지고, 세부적인 모양과 사용되는 장소에 따라 명칭을 달리한다. 투구의 경우도 모양에 따라 종장판투구, 차양투구, 충각부투구 등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판갑옷(板甲) : 판갑옷은 철판의 모양과 철판을 이은 방법에 따라 종장판정결판갑옷(縱長板釘結板甲), 종장판혁철판갑옷(縱長板革판板甲), 방형판혁철판갑옷(方形板革판板甲), 삼각판정결판갑옷(三角板釘結板甲), 삼각판혁철판갑옷(三角板革판板甲), 횡장판정결판갑옷(橫長板釘結板甲)으로 나누어진다.

종장판계판갑옷(縱長板系板甲)은 전시기의 나무갑옷 혹은 가죽갑옷의 소재가 철제로 전환하여 발전한 남부지방의 자생적인 철제 갑옷으로 종장판(縱長板)의 철판 9-11개를 가죽이나 못으로 연결시키고 위와 아래의 가장자리에 도련판과 고대판을 대었다. 특히 도련판은 철제갑옷의 발생 초기부터 갖추어져 있어 이전 시대의 정형화된 갑옷문화의 한 형태를 알 수 있다. 종장판판갑옷에 있어 최고(最古)의 형태는 경주 정래동 출토품을 들 수 있으며 이는 전동(前胴) 및 후동부(後胴部) 고대판이 없다가 점차 고대판이 생기고 궐수문의 장식이 가해지는 것과 같은 김해 퇴래리 출토품과 같은 형태로 발전한다.

이러한 종장판계판갑옷의 가장 큰 특징은 목을 보호하는 목가리개갑옷(頸甲)이 판갑옷의 뒤쪽 고대부에 부착되어 있는 것과 반달모양의 측경판이 양어깨에 부착하는 것이다. 갑옷의 착장시 인체와 마찰이 심한 갑옷의 외연에는 복륜(覆輪)을 행하는데 종장판계판갑옷에는 넓은 가죽띠를 철판에 감싼 후 박음질을 행한 혁포복륜(革包覆輪)과 갑옷의 가장자리에 구멍을 촘촘히 뚫어 가죽끈을 엮은 혁뉴복륜(革紐覆輪), 가장자리에 철판을 접어 덧댄 절판복륜(絶版覆輪)이 있다. 이러한 종장판계판갑옷은 낙동강하류역에 집중 분포한다. 경주 정래동, 울산 중산리 75호분, 부산 복천동 10·38·46·57호분, 김해 대성동 고분군, 김해 양동 78호분, 傳 김해 퇴래리 출토품, 호림박물관 소장품 등이 있으며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에 출현하여 5세기 전반에 사라진다.

삼각판판 갑옷 - 함안 도항리 13호

삼각판판 갑옷 - 함안 도항리 13호

방형판혁철판갑옷(方形板革판板甲)은 현재 남부지방에서는 동래 복천동 64호의 예가 유일하다. 형태는 평양 석암리 219호에서 출토된 가죽갑옷의 소찰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4세기 초에 갑옷제작의 소재가 철로 전환되면서 나타난 철제갑옷의 한 형식으로 보인다. 이것은 중국의 경우 가죽갑옷에서 철제로 소재의 변화만 가져온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의 호화호특이십가자한성(呼和浩特二十家子漢城) 출토품과 거의 유사하다.

삼각판판갑옷(三角板板甲)은 지판이 작은 삼각형을 이루고 고대판과 도련판을 갖춘 7단구성의 매우 정형화된 판갑옷이다. 지판을 가죽으로 연결한 것을 삼각판혁철판갑옷, 못을 사용한 것을 삼각판정결판갑옷이라 한다. 대체로 갑옷을 입고 벗을 때 오른쪽을 여닫는 우측개폐식이며, 개폐부에는 가죽 혹은 고리경첩을 달았다. 복륜기법은 혁뉴복륜을 행한 합천 옥전 68호, 복천동 4호의 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단면 ‘U’자상의 철판을 가장자리에 씌운 철포복륜을 행하였는데 이것은 시기적인 차이로 보인다. 또한 후동고대판과 연결하여 전동부 고대판 혹은 수상 1단에 멜빵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착장시 어깨부분에 걸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갑옷은 복천동 4호분과 연산동 고분군 출토품을 제외하면 대부분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안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으며, 가장 이른 예가 합천 옥전 68호이며 함양 상백리, 부산 가달, 창녕 교동 3호, 청주 신봉동 출토품 등이다.

횡장판판갑옷(橫長板板甲)은 삼각판판갑옷과 마찬가지로 여러 매의 삼각형 지판을 이은 형태에서 횡으로 긴 장방형 철판을 인체의 곡선에 맞춰 이은 7단 구성의 정형화된 판갑옷이다. 현재까지는 그 출토 예가 극히 적은 편에 속하며 고령 지산동 32호분과 합천 옥전 28호분 2예가 있다.

비늘갑옷: 부산 복천동 11호분. 길이 24.0cm

비늘갑옷: 부산 복천동 11호분. 길이 24.0cm

비늘갑옷(卦甲) : 비늘갑옷이란 일정한 크기의 작은 철판을 횡으로 이어 고정시키고 이들을 다시 종으로 연결하여 상하 유동성을 가지도록 한 갑옷으로 찰갑(札甲)이라고도 부른다. 착장시 활동성을 고려해 만든 것으로 판갑옷이 보병용으로 사용된 갑옷이라면, 이것은 만곡종장판투구(彎曲縱長板胄)와 함께 세트를 이룬 기승용으로 표현 될 수 있으며 목가리개(頸甲), 어깨가리개(肩甲), 가슴가리개(上膊甲), 팔뚝가리개(脾甲), 치마갑옷(裳甲), 대퇴부가리개(大腿甲), 정강이가리개(脛甲) 등 부속갑옷을 구비한다.

비늘갑옷은 삼국 중 고구려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어 백제나 신라·가야로 퍼져 나간 것 같다. 고구려고분에서 출토된 가장 이른 시기의 비늘갑옷은 5세기 초경의 우산하(禹山下) 31호분 출토품이 있지만, 오히려 안악 3호분의 행렬도에 완성된 형태의 비늘갑옷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 실물자료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제작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알려주는 예가 경산 조영 1B-60호, 복천동 38·64호분에서 출토된 초기 형태의 비늘갑옷의 예가 있으며 4세기 초에 해당한다. 4세기 후반에 해당하는 김해 대성동 3호분의 비늘갑옷, 목가리개, 투구의 공반 출토가 좋은 예이다.

4세기대 비늘갑옷의 철판 형태는 길이, 너비가 8-10×4-5㎝ 크기의 상원하방형(上圓下方形) 철판이 7단으로 구성되며 그 중 3-4단에는 장방형의 만곡한 요찰이 있다. 그러나 폭발적으로 많은 출토량을 보여주는 시기는 역시 5세기 중엽-6세기 전반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이전의 비늘갑옷은 그 제작기술의 어려움으로 지배계층의 상징적인 부장품의 하나였으나 이후 중소형의 고분에까지 부장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보편화된 갑옷의 형태이며 합천 옥전 고분군에서는 3벌을 함께 묻기도 하였다. 5세기 비늘갑옷의 철판 형태는 4세기대의 그것에 비해 작고 세장한 철판으로 이루어졌으며 철판의 숫자가 더욱 많아지고 규격화하여 제작기술이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목가리개갑옷(頸甲)은 목을 보호하는 갑옷 부속구의 하나로 밖으로 휜 규형(圭形)의 철판을 부채꼴모양으로 엮어 만들었다. 테두리에는 혁포복륜을 행하였다. 이러한 목가리개는 비늘갑옷과 함께 변하며, 대체로 지판(地板)의 폭이 넓고 매수가 적은 것에서, 지판 폭이 좁고 매수가 많아지는 형태로 변화한다. 원래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볼 때 목가리개는 비늘갑옷과 함께 입고 있으나 가야의 제 지역에서는 목가리개만 출토되는 경우가 있어 유기질제 비늘갑옷의 존재를 추정할 수도 있다. 목가리개가 출토된 유적은 동래 복천동 10·11·16·21·22호분, 김해 대성동 39호분, 합천 옥전 70호, 남원 월산리 고분군, 경산 임당지역 고분군 등이 있다.

팔뚝가리개갑옷(臂甲)은 2-3매의 판을 원통형으로 만든 것이다. 종래 정강이가리개로 인식하였던 것이나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보면 정강이를 비롯한 하반신은 소찰로 이루어진 갑옷을 입고 있다. 대구 비산동 34호분에서의 경우 관모와 은제허리띠장식의 사이에서 출토된 상태로 보아 손목과 팔꿈치 사이의 팔뚝을 가리기 위한 것으로 비늘갑옷의 부속구로 볼 수 있다. 실제 출토 예로는 실전용이라고 생각되는 철제는 동래 복천동 11호분, 상주 신흥동 37호분 출토품 2점뿐이며, 대부분은 금동제 혹은 은제로 경주의 대형분인 황남대총, 천마총, 금관총, 대구 비산동 34호분 등에서 출토되었다.

종장판투구(縱長板胄) :가늘고 긴 철판을 이어 만든 투구로 주체(胄體)와 반원형의 복발(覆鉢), 볼가리개와 수미부(首尾部)로 구성된다. 종래 몽고발형투구(蒙古鉢形胄)라고 불리던 것이다. 종장판주에는 크게 2가지 형태가 있는데, 지판의 폭이 좁고 매수가 많으며 ‘S’자형으로 휜 만곡종장판투구(彎曲縱長板胄)와 지판의 폭이 넓고 상대적으로 매수가 적으며 내측으로만 굽은 종장판투구(縱長板胄)가 그것이다. 또한 종장판투구는 1-2매의 철판을 이은 판형 볼가리개가 대부분이고 복발이 없으나, 만곡종장판투구는 상원하방형의 작은 소찰로 이루어진 소찰형 볼가리개를 가진다.

그러나 꼭 복발이 없다고 해서 투구의 정부(頂部)가 열려있는 상태는 아니라고 생각되며 유기질로 된 복발 혹은 막음장치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2가지 형태의 차이는 계보의 차이로 보기보다는 복발의 유무로 계층이나 시기적인 차이로 보기도 한다. 이유는 현재의 자료로 보는 한, 종장판투구는 4세기대에 빈번히 출토되다가 5세기대 이후가 되면 남원 월산리 고분과 합천 옥전 M3호 출토품 2점의 예 뿐이고 만곡종장판투구는 4세기 후반대부터 꾸준한 분포양상을 보이다 5세기대에 비늘갑옷의 보급과 함께 폭발적으로 많은 양이 출토되기 때문이다.

종장판 투구 세부명칭

종장판 투구 세부명칭

김해 예안리 150호

김해 예안리 150호

구조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주체(胄體)는 평면 원형을 이루고 종장판투구와 같이 지판의 폭이 넓을 경우 8-14매, 만곡종장판투구와 같이 폭이 좁을 경우 30-40매 이상으로 구성된다. 지판과 지판의 연결은 주체의 상방과 하방에 있는 2공1조의 구멍을 통해 가죽으로 혁결(革結)한다. 주체의 전면에는 삼각형으로 미간부(眉間部)를 만들며 하연(下緣)은 혁포복륜을 행한다. 볼가리개와 수미부는 없는 것도 있으나 가죽이나 천 등 유기질로 된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복발은 하연에 작은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30개 이상 있어 혁포복륜을 행하고 또 주체와 연결할 때 사용한다. 또한 정수리 부분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관을 꽂아 술을 달기 위한 장치로 보여지며 고구려 벽화고분에 묘사된 예가 많다. 종장판투구가 출토된 유적은 대체로 동래 복천동 고분군, 합천 옥전 고분군, 김해 대성동 고분군, 경주 황남동 109호 3·4곽, 고령 지산동 고분군 등 신라·가야지역에 집중분포하나, 최근의 발굴성과에 의하면 청주 신봉동 고분군, 함평 신덕 고분군에서도 출토되었다.

차양투구, 고령 지산동 1-3호

차양투구, 고령 지산동 1-3호

차양투구(遮陽胄) :챙이 달린 투구의 한 형태로 반구형의 주체(胄體) 앞에 반원형의 챙을 붙인 소위 미비부투구(眉庇付胄)이다. 주로 정결법(釘結法)으로 만든 것이 많으며 구성철판의 종류에 따라 여러 형식이 세분되는데 종장판과 장방판이 있다. 주체상부의 복판과 중위, 하위의 대판을 기본으로 하며 그 사이를 여러 모양의 철판으로 메운 것이다. 복판의 상부에는 반구형의 복발이 있으며 복발과 관으로 연결된 수발이 있다.

주체의 하부에는 후두부와 볼을 보호하는 가리개가 있다. 이러한 차양투구는 일본에서는 그 출토 예가 많으나 한국에는 그다지 없는 편으로 그것은 전통적인 종장판투구가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차양투구가 부산 연산동 고분군 출토품이라고 하는 몇 점이 알려져 있으나, 출토지가 확실한 것으로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 Ⅰ지구 3호, 김해 두곡 43호분 출토품이 있다.

총각부투구. 고령 지산동 32호

총각부투구. 고령 지산동 32호

충각부투구(衝角附胄) : 투구의 정면이 돌출한 형태로 평면형태는 복숭아형, 측면형태는 반타원형을 이룬다. 투구의 사부에서부터 전방부에 이르기까지 밥주걱 모양의 복판이 있고, 복판의 위에는 삼미촉이 있다. 차양투구와 마찬가지로 주체의 하부에는 후두부와 볼을 보호하는 가리개가 있다. 이러한 충각부투구는 구성철판의 종류와 결합기법에 따라 세분되는데 지금까지 출토된 충각부투구는 모두 3점으로 고령 지산동 32호분과 함양 호생원 1호분 것이 횡장판정결충각부투구, 부산 오륜대 고분군 채집품이 삼각판혁결충각부투구이다. 이러한 충각부투구는 미비부투구와 함께 이웃 일본에서 주로 많이 출토되는 투구의 형태로 한·일 갑옷연구의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 釜山 五侖臺採集甲胄類(宋桂鉉, 博物館硏究論集6, 釜山廣域市立博物館, 1997년)
  • 三國時代 鐵製甲胄의 硏究(宋桂鉉, 慶北大學校碩士學位論文, 198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