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띠장식

허리띠장식

[ 帶金具- 腰佩 ]

금제 허리띠, 드리개(경주 금관총 출토, 허리띠 길이 109cm, 드리개 길이 54.5cm)

금제 허리띠, 드리개(경주 금관총 출토, 허리띠 길이 109cm, 드리개 길이 54.5cm)

허리띠장식으로 천이나 가죽으로 만든 띠의 표면을 장식하기 위한 대금구(帶金具)와 이에 매달리는 장식으로, 이러한 장식은 금, 은, 동, 옥, 철, 돌, 뼈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조각·장식하여 만든 것이다. 허리띠장식의 기원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에까지 소급되는 것으로서 유목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허리띠에 차고 다니던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삼국시대가 되면 허리띠장식은 권력과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변화하며 신분에 따른 재질과 장식의 차이가 뚜렷이 나타난다.

삼국시대 허리띠는 표면에 장식을 붙이는 과판(銙板) 혹은 과대금구(銙帶金具)와 띠 한쪽 끝에 붙이는 대단금구(帶端金具), 다른 끝에 붙이는 띠고리(鉸具)로 구성되며, 요패에는 이배형(耳杯形), 장규형(長圭形), 물고기모양 수식(垂飾), 곡옥(曲玉), 숫돌, 침통(針筒), 약롱(藥籠) 등 특정한 의미를 상징하는 다양한 물체를 매달았다.

과대금구는 그 형태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역심엽형과판에 둥근고리를 매단 형태로 종래 과대형식 중 막연히 고식(古式)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나 띠끝장식과 함께 완전한 1식으로 출토된 예가 아닌 과판만 1-2개씩 출토하는 경우에는, 여러 가지 출토상태로 미루어 보아 화살통(盛矢具)의 허리장식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둘째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로 방형(方形)의 과판(銙板)에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을 투조하거나 점열문으로 시문하고, 그 하변에 삼엽문(三葉文)이 투조된 역심엽형(逆心葉形)의 드리개를 매단 것으로 삼국시대 과대의 대부분이 이 형태이다. 또한 재질에 따라서 신분의 서열이 나뉨을 출토양상으로 알 수 있는데, 금제과대는 황남대총,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 등에서 출토되었고, 은제과대는 황오리 54·82호분, 호우총, 양산 부부총, 창녕 교동 7·89호분, 경산 임당 6A호 등에서 출토되어 가장 양이 많다.

셋째는 인동문과 삼엽문을 기본으로 하는 문양이 용문이나 괴수면(怪獸面) 등 다른 동물문으로 변형한 것으로, 방형의 과판에 문양을 타출하거나 투조하여 다른 금동판 위에 얹은 형태이다. 이와 같은 수면(獸面)은 고대 중국에서 벽사(벽邪)의 의미로 즐겨 애용되던 도안으로 한국과 일본에서도 과(銙)의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출토 예로 보아 모두 금동제로 경주 황남대총 남분, 합천 옥전 M1호분, 공주 송산리 2호분, 황룡사지 출토품 등이 있다.

이러한 삼국시대의 과대장식은 6세기에 이르러서는 간략화, 실용화하면서 금·은제의 화려한 장식은 자취를 감추고 청동이나 철제의 방형, 혹은 반원형의 과판이 등장하는데 역심엽형의 드리개가 사라지고 과판의 내부에 방형의 구멍을 뚫는다. 7세기 중엽 이후에는 당(唐)식의 복식제도가 도입되면서 허리띠로 인한 복식의 규제가 더욱 강화된다.

참고문헌

  • 三國時代 耳飾과 帶金具의 分類와 編年(李漢祥, 三國時代 裝身具와 社會相, 1999년)
  • 考古資料를 통해 본 우리 나라 古代의 冠(咸舜燮, 三國時代 裝身具와 社會相, 1999년)
  • 羽毛附冠飾의 始末(申大坤, 考古學誌 8, 1997년)
  • 高句麗考古學硏究(東潮, 1997년)
  • 신라와 가야의 裝身具(李仁淑, 韓國古代史論叢 3, 1992년)
  • 裝身具(윤세영, 한국사론 15, 국사편찬위원회, 19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