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이

발걸이

[ 鐙子 ]

등자(鐙子). 의성 탑리(길이 28.0cm)

등자(鐙子). 의성 탑리(길이 28.0cm)

호등(壺鐙). 경주 황오동(높이 14.7cm, 左)

호등(壺鐙). 경주 황오동(높이 14.7cm, 左)

발걸이(鐙子)는 기승자(騎乘者)가 말에 오를 때와 달릴 때 양발을 끼워 안정을 유지하는 말갖춤으로, 발걸이의 병부(柄部) 끝에 마련되어 있는 구멍에 가죽끈을 연결하여 안장(鞍裝)에 매단다. 발걸이는 그 재질과 모양에 따라 분류되는데, 재질로는 크게 나무로 제작한 후 겉면에 금속판을 덧댄 것과 순수하게 금속으로만 제작된 것으로 분류된다. 또 모양에 따라서는 크게 윤등(輪鐙)과 호등(壺鐙)으로 나눌 수 있다.

삼국시대에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된 발걸이는 윤등(輪鐙)으로 발을 딛는 윤부(輪部)와 윤부 위에 연결되어 가죽끈을 통해 안장에 착장시킬 수 있도록 된 병부(柄部)로 구성되어 있다. 윤등은 재질에 따라 발걸이의 전체적인 형태를 나무로 제작한 후 그 표면의 일부 또는 전체에 금속판을 덧대어 붙인 목심금속판피윤등(木心金屬板被輪鐙)과 일체를 철이나 동 등의 금속으로 제작한 금속제윤등(金屬製輪鐙)으로 나눌 수 있으며, 그 수가 많지는 않으나 나무등자에 가죽을 입힌 것도 중국의 遼寧省 朝陽 袁台子墓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목심금속판피윤등은 금속의 재질에 따라 목심철판피윤등(木心鐵板被輪鐙), 목심금동판피윤등(木心金銅板被輪鐙) 등으로 나누어진다.

세부명칭

세부명칭

금속판피윤등(金屬板被輪鐙)의 경우 표면에 원두정(圓頭釘)을 촘촘히 박거나 각종 투조기법으로 투조하여 장식한 것도 있다. 윤부(輪部)의 아래 부분에 말탄 사람의 발바닥이 닫는 부분을 답수부(踏受部)라 하는데 답수부에는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는 방두정(方頭釘)이라는 못이 박혀있는 것도 있다. 또 답수부를 2가닥이나 3가닥으로 나누어 제작하여 발이 닿는 부분을 넓힘으로써 안정감을 주게 한 윤등도 나타나게 된다.

호등(壺鐙)은 윤부(輪部)가 주머니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어 기승자(騎乘者)의 발을 감싸주게 되어있는 발걸이(鐙子)이다. 삼국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는 합천 반계제 다-A호분 출토품이 유일한 것으로 삼국시대에는 그다지 유행하지 못하였다. 호등도 윤등과 마찬가지로 재질과 제작방법에 따라 나무로 제작한 후 겉면의 일부나 전체를 금속판으로 덧댄 것과 일체를 금속으로 제작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출토 예가 없으나 일본에서는 목제호등(木製壺鐙)도 출토되고 있다. 또 호등은 발을 넣는 호부(壺部)의 형태에 따라 표자형호등(杓子形壺鐙)과 삼각추형호등(三角錐形壺鐙)으로 나눌 수 있다.

발걸이의 발생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으나 현재로서는 히구찌 타까야스(樋口隆康)의 설이 가장 설득력 있는 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중국의 湖南省 長沙金盆嶺 21호묘에서 출토된 기마용(騎馬俑)의 좌편측에만 묘사된 발걸이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주장하였다. 이 묘에서는 영녕(永寧) 2(302)년이 새겨진 벽돌이 출토되어 서진대(西晉代)의 무덤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기마용에 표현되어 있는 발걸이는 한쪽에만 있다는 점과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이 발걸이에 발을 걸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어 말을 달릴 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오르내릴 때 사용한 발걸이로 보았다. 또 그는 발걸이의 출현은 유목민보다는 기마술에 서툴렀던 한족(漢族)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비해 쌍을 이룬 발걸이의 등장은 동진(東晉)시대인 영창원년(永昌元年, 322)에 사망한 왕리(王理)의 묘로 추정되는 南京市 象山 7호묘 출토의 도마용(陶馬俑)에 묘사된 것을 최고의 발걸이로 보고 있다.

실물발걸이로는 遼寧省 北票縣 房身村 M8호분 출토 쌍등(雙鐙)이 4세기 전엽쯤으로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것이며, 河南省 安陽 孝民屯 154호묘와 朝陽 袁台子墓 출토품이 대체로 4세기 중엽쯤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실연대를 보여주는 발걸이로는 遼寧省 北票縣 西官營子에서 발굴된 馮素弗墓 출토품으로 무덤의 주인공인 馮素弗이 사망한 415년이라는 확실한 연대를 가지고 있다. 이 발걸이는 목심금동판피윤등으로 그 연대가 확실해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발걸이와 함께 삼국시대의 발걸이의 연대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주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삼국시대에 있어 발걸이의 등장은 현재로서는 중국 동북지방과 고구려의 영향으로 4세기 중엽 이후의 고분에서 처음으로 출토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자료로 보는 한 최고의 발걸이는 부산 복천동 48호분에서 출토된 목심철판피윤등으로 판단된다. 이 무렵부터 한반도 남부지방에는 본격적인 기승용(騎乘用) 마구(馬具)가 수용되기 시작한다. 특히 김해(金海) 대성동(大成洞) 고분군(古墳群)을 중심으로 한 전기 가야세력에서 선진적인 마구문화를 전개해 나간다. 5세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려의 영향으로 신라·가야 전역으로 선진적인 마구문화가 급속도로 보급되게 된다. 이 시기의 발걸이는 대부분이 병부(柄部)가 짧은 단병계(短柄系)이며 병(柄)의 너비도 비교적 넓고, 병부의 앞·뒷면에 덧댄 철판이 상하 2부분으로 분리되어 있는 특징을 가진다. 또 답수부(踏受部)가 위로 돌출한 소위 도(倒)하트형을 이루는 특징도 있다.

이후로 5세기 중·후엽경에는 목심금속판피발걸이(木心金屬板被鐙子)와 함께 철제발걸이(鐵製鐙子)도 제작되며, 병부의 폭은 좁아지고 길이가 길어지는 반면 답수부의 폭이 넓어지는 양상이 보인다. 가야지역에서는 앞면의 중앙에 능(稜)이 지는 독특한 발걸이가 제작되기도 하고, 신라지역에서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발걸이 전체를 금속판으로 덧댄 것이 가야지역에 비해 유행한다. 6세기의 발걸이는 답수부가 2줄이나 3줄로 나누어져 넓어지고 가야지역에서는 병부의 끝부분과 병부와 윤부가 만나는 부분 등 일부분에만 철판을 덧댄 실용적인 발걸이가 주로 제작된다.

발걸이는 재갈과 함께 마구 연구의 중심에 있고, 특히 계통문제와 편년문제가 한국 고고학계의 뜨거운 논쟁중의 하나였으며 아직까지 완전하게 의견의 일치가 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마구의 편년과 계통문제가 마구 자체에만 그치지 않고 삼국시대 고분편년에 있어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는 자료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마구가 일본마구의 출현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일본의 고분편년에도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학자들 간의 발걸이에 대한 상이한 편년관과 계통관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아 논란이 되고 있기도 하다.

먼저 원주 법천리(法泉里)에서 출토된 발걸이의 편년문제가 그 중의 하나이다. 법천리에서는 2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그 중 1호분에서 발걸이가 출토되었다. 문제는 함께 수습된 동진(東晉)시대인 4세기 전반대로 추정되는 청자양형기(靑磁羊形器)와 용수병초두(龍首柄鐎斗)가 어느 유구에서 공반하여 출토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2점의 유물이 발걸이가 출토된 1호분에서 공반출토된 것으로 판단하여 발걸이의 연대를 4세기 전반으로 해석한 연구자가 있는 반면, 발걸이가 앞의 유물들과 달리 2호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고 발걸이의 연대는 4세기 전반대가 결코 될 수 없고 발걸이와 함께 출토된 재갈과 발걸이의 형식으로 보았을 때 최소한 5세기 후반 이후에 유행하는 형식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논쟁은 단순히 발걸이 하나의 편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경주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서 출토되는 발걸이의 연대문제와 연결되어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의 연대 비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즉 신라고고학에서 가장 논의의 쟁점이 되어 왔던 황남동 109호분 3·4곽의 연대문제이다. 전자의 견해라면 황남동 109호분 등자는 4세기까지 소급할 수 있으나 후자의 경우라면 앞에서 설명한 풍소불묘 등자 등을 고려할 때 결코 황남동 109호 3·4곽을 4세기로 소급하여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韓國의 馬具(李蘭暎·金斗喆, 韓國馬事會 馬事博物館, 1999년)
  • 韓國 古代의 馬具와 社會(姜裕信, 學硏文化社, 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