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갖춤

말갖춤

[ 馬具 ]

말을 부리기 위해서 말에게 장착하였던 각종 장구(裝具)들을 통칭하는 것으로, 마구는 그 기능과 사용목적에 따라 말의 제어용(制御用), 안정용(安定用), 장식용(裝飾用)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제어용으로는 직접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銜,표,알,비)이 대표적이며, 이들 재갈을 장치하기 위하여 말의 얼굴에 씌운 굴레(勒, 頭絡, 面繫)와 기승자의 의지를 손을 통해서 말에게 전달하게 하는 고삐(비,강, 手網)가 조합을 이루어 말의 전·후·좌·우 방향으로의 전환 혹은 전진과 멈춤을 제어할 수가 있다.

안정용은 기승자가 말을 탔을 때 몸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서, 말의 돌출된 척추 뼈와 기승자의 엉덩이 사이에서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좌석에 해당하는 안장(鞍)과 말에 올라타거나 달릴 때의 발디딤용인 발걸이(등)가 있으며, 안장을 말등 위에 안정되게 얹기 위해서는 가슴걸이(靷, 胸繫)와 후걸이(추, 尻繫) 혹은 복대(腹帶)가 연결된다. 굴레, 고삐, 가슴걸이, 후걸이, 복대 등은 모두 부식하기 쉬운 유기질제의 끈으로 되어 있어서 이들 장구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예는 극히 드물다. 이 중 특히 굴레, 가슴걸이, 후걸이를 삼계(三繫)라고 한다.

장식용은 말을 장식하기 위한 장구들로서 이를 통해서 기승자의 신분과시나 위엄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대부분 삼계에 이들 장식이 가해진다. 말띠꾸미개(雲珠), 말띠드리개(杏葉), 말방울(馬鈴), 말종방울(馬鐸), 고리방울(環鈴) 등이 있다.

이밖에 말투구(馬胄)나 말갑옷(馬甲)과 같이 전시에 말의 몸을 보호하는 전마구(戰馬具)와 말등의 후위에서 깃발 등을 꽂게 된 사행상철기(혹은 寄生), 딱딱한 길에서나 장시간에 걸친 기승으로부터 말굽을 보호하기 위한 편자(蹄鐵) 등의 마구가 알려지고 있다.

이상의 각종 마구들은 그 기능과 용도가 각각 다른 만큼 이들이 출현하는 시기도 또 지역적으로 나타나는 양상도 제각기 다르다. 한국에서의 마구 도입과 변화 역시 시기적·지역적으로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실물자료의 예가 많은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개관해 보면 아래와 같다.

『사기(史記)』 조선열전에 의하면, 한무제와 위만조선 우거(右渠) 사이에 알력이 있었을 때 우거가 말 5천 필과 군량미를 내어주어 화친을 청하였다는 기사는 한국의 말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서 이 무렵 위만조선은 대량으로 말을 사육하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그러나 실물자료로써 확인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한국에서 마구의 보급은 낙랑의 설치에 따른 중국 차마제(車馬制)의 전래를 고려해야 한다. 이때의 마구로는 수레부속구와 재갈 및 삼계를 연결하기 위한 환형의 고리가 중심을 이룬다. 당시의 재갈은 고삐이음쇠(引手)가 없는 표비(표비)로서 표(표: 고삐를 당길 때 말의 입에 물린 함이 빠지지 않도록 말의 양쪽 뺨에 대는 ‘S’자 혹은 ‘I’자 모양의 봉상 함유)의 중앙부 근처를 두툼하게 하여 여기에 2공을 뚫고 굴레연결용의 끈을 각각 꿴 구조의 것이다. 함은 2공 사이의 오목한 곳에 위치한다. 이러한 구조의 표비는 삼한사회에도 전해져 철제로서 자체 제작되다가, 덧널무덤(후기 와질토기시대)단계가 되면 표의 중앙에 1공을 뚫어 여기에 함의 외환을 꿰게 한 구조로 변화되어 남부지방 고유한 형식을 이룬다.

한국의 마필문화가 일대 변혁을 보게 된 것은 4세기에 들어서면서이다. 재갈을 중심으로 보면, 새로이 인수가 채용되고 종래 2줄로 이루어지던 굴레연결이 1줄로 된다. 특히 인수의 채용은 중장기병술의 채용과 깊이 관계되며 이때부터 비로소 1인 기승(騎乘)이 크게 보급되게 된다. 이 시기에 보여지는 변화는 3세기 말 중국북방의 선비(鮮卑)를 비롯한 호족(胡族)들이 중원의 혼란을 틈타 제각기 발호하여 중원에 진출해 나라를 세우게 되면서 중국 전통의 마구를 일부 채용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진 변화로 생각되며, 중장기병술은 그와 같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 채용되었던 전술이다. 대표적인 것이 선비계의 판비(板비)로서 굴레연결이 1줄로 되는 것은 그 영향이다. 당시의 동아시아는 격변기로서 제 민족의 접촉이 빈번하였기에 그 와중에 새로운 마구와 전술이 각지로 파급되어 한국에도 영향을 미친다.

남부지방에서 이러한 인수 채용의 새로운 마구와 기승법 및 전술을 가장 빨리 채용한 곳은 낙동강하류역으로서 김해 대성동 유적과 부산 복천동 유적의 4세기대 마구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 변화는 매우 다양하여 부여계→재지화→선비계 비(비)가 각각 시기에 따라 유행하게 된다. 재갈을 비롯한 마구의 파급이 한 번에 거친 것이 아니며, 그 사이 이 지역에서 끊임없이 재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이 시기는 재갈의 종류도 다양하여 함유의 형태에 따른 분류인 표비, 환판비, 판비가 모두 보여진다. 그 외 목심철제발걸이(木心鐙子)와 말띠드리개도 사용되고 있다. 말띠드리개는 철제의 종장심엽형(縱長心葉形)이 출토되고 있다. 아마 경식(硬式) 안장(鞍裝)을 포함한 1인 기승의 마구 1식이 모두 사용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에서는 최근 선비계의 비가 보고되고 있다.

남부지방에서는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을 계기로 5세기 전반대에는 또 한 번 마필문화에 커다란 변화가 보여진다. 이전의 낙동강하류역 중심에서 전 영남지역으로 마구가 확산되는데, 이는 영남사회를 동요시킨 고구려군의 우수한 기동력에 자극을 받은 탓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때도 마필문화의 선진지역이었던 낙동강하류역에서는 재지화와 자체 개량의 작업이 착착 진행되어 영남지역에의 마구 확산을 주도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재갈에 있어서 ‘ㅗ’자형 환판비(環板비)의 개발과 철봉을 꼬지 않은 한 가닥(條線) 인수의 출현을 들 수 있다. 특히 ‘ㅗ’자형 환판비에서 야기된 함과 인수의 연결방법상의 변화는 가야, 신라, 백제 등 남부지역의 마구를 고구려 등 북방의 마구와 구별 짓는 큰 특징이 되어 가히 재갈의 남부지역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거의 5세기 전반대까지로 한정할 수 있는 재갈의 특징 중에는 방형의 인수외환과 선비계인 방형과 원형의 환을 결합한 형식의 인수호(引手壺)도 있다. 이 시기의 발걸이로는 자루(柄)의 폭이 상대적으로 넓은 목심철판장윤등(木心鐵板張輪鐙)이 주로 사용되는데, 병부 전·후면의 철판보강이 상하 이단으로 분리되는 것이 특징이다가 2/4분기 말에는 1단으로 된다. 철제의 안장과 소문심엽형말띠드리개(素文心葉形杏葉), 환형말띠꾸미개(環形雲珠), 고리방울(環鈴) 및 말투구나 말갑옷 등의 실물 출토 예도 알려지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신라는 착실히 가야와 고구려의 양 지역으로부터 마구문화를 수용하고 있다.

5세기 후반대가 되면 그러한 바탕 위에서 성립한 신라와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가야연맹의 마구(馬具) 간에 뚜렷한 지역분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 특징이다. 가야는 대략 450년을 전후로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전기와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의 2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5세기 후반대의 후기 가야연맹은 낙동강을 경계로 신라와 서로 대치하는 국면에 접어들고 그것이 마구에도 반영되고 있다. 이 시기 양 지역간에는 재갈의 경우 함-인수의 연결이 전시기의 함외환 횡방향 삽입의 전통 위에서 철봉을 꼬지 않은 일조선인수(一條線引手)가 주로 사용되고 인수외환은 환형(環形)으로서 본체에서 굽어 있다거나, 발걸이는 병의 폭이 좁아지고 길이가 길어진 일반적 경향을 보이며, 또 장식안장(裝飾鞍)을 중심으로 무각(無脚) 이단식(二段式)의 좌목선교구가 계속 사용되는 등의 공통요소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갈은 가야에서 내만타원형(內彎楕圓形)과 ‘f’자형의 판비가 사용되고 등자모양의 인수호, 유환(遊環)의 사용, 입문공(立聞孔)이 작은 구멍모양으로 종장방형의 구금구(鉤金具)와 철봉모양의 구(鉤)를 가짐에 비하여, 신라에서는 타원형에 심엽형의 판비가 부가되고, 유환이나 인수호는 사용되지 않으며 장방형 입문공에 구금구의 구는 대상인 특징을 가진다. 또 가야의 발걸이는 전면 중앙에 능진 형식이 주류를 이루어 신라의 발걸이와 차이를 보여준다. 안장은 가야에서는 좌목선교구가 이각식이고 좌금구는 평면타원형으로서 중앙이 돌출한 입형(笠形)으로 통일되나, 신라에서는 일각식의 좌목선교구와 단면이 편평하고 오각형 혹은 타원형 평면의 한쪽 면이 내만한 특징을 가진 좌금구가 많이 사용된다.

말띠드리개는 신라에서는 편원어미형이, 가야에서는 그것에 자극 받아 만들어진 검능형이란 서로 다른 형식이 각각 사용되고 있다. 말띠꾸미개는 가야에서는 실용의 환형말띠꾸미개가 주류를 이루나, 신라에서는 입주부말띠꾸미개(立柱附雲珠)와 무각소반구형말띠꾸미개(無脚小半球形雲珠)가 채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각종 마구의 차이는 마장에도 반영되어 가야는 단조식(單條式)의 실용 마장을 계속 채택하고 있음에 반해, 신라는 고구려의 마장제를 수용하여 격자식 후걸이(尻繫)의 귀족적 식마풍습이 확산되고 있다. 이 시기에는 백제·가야·왜와 중국 동북지방·고구려·신라라는 두 개의 축으로 된 지역 간의 친연성을 마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6세기대가 되면, 재갈은 원환비(圓環비)가 새로이 채용되고 단환판비는 복환판비로 변화하여 표비·판비와 함께 다양한 형식이 사용되게 된다. 함·인수의 제작시 본체의 끝을 구부려 환을 만든 후 그 끝을 본체에 감는 마무리 기법이 백제에서 유행하여 영남지역에도 영향을 준다. 두 가닥(二本條)의 인수도 채용되고, 본체를 꼬아서 만든 예도 있으며 삼연식(三連式)의 함이 재등장한 예도 보여진다. 발걸이는 답수부(踏受部)의 폭을 넓혀 2조, 3조로 갈라진 철제가 많이 보급되며, 가야나 백제의 목심발걸이는 현수공 부위나 병과 윤의 경계부위 등 중요부분에만 철판을 대어 보강하는 간략하면서도 실용적인 것이 주로 만들어지고 있다.

마장의 변화는 신라에서 두드러져 유각식의 반구형말띠꾸미개나 패제말띠꾸미개(貝製雲珠)가 새로이 사용되기 시작하여 종래의 입주부말띠꾸미개나 무각소반구형말띠꾸미개를 대체하며 이는 후걸이가 복조식 혹은 약화된 격자식으로 변화한 것을 의미한다. 6세기 중엽에는 신라에서 종형(鐘形)·자엽형(刺葉形) 등등 새로운 형식의 말띠드리개도 출현한다. 가야가 멸망한 6세기 중엽경 이후는 새로운 묘제의 채용과 박장(薄葬) 풍습의 확산으로 마구의 분묘 부장 사례는 거의 없어지게 된다.

말갖춤(금령총)

말갖춤(금령총)

참고문헌

  • 韓國의 馬具(李蘭暎·金斗喆, 韓國馬事會 馬事博物館, 1999년)
  • 三國時代 비의 硏究(金斗喆, 嶺南考古學報 13, 嶺南考古學會, 1993년)
  • 新羅와 加耶의 馬具(金斗喆, 韓國加耶史論叢 3, 韓國加耶社會硏究所編, 199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