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구석기시대

후기구석기시대

[ 後期舊石器時代 ]

일반적으로 다양한 돌날석기공작이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인류문화발전단계이며 클라크의 분류에 의하면 모드 4에 해당하는 시대로, 대략 4만년 전에서 1만년 전의 시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세계적으로 기후가 대단히 추워지는 시기이며 체질적으로 완전한 현생인류가 전 세계적으로 출현하는 시기이다. 예술적인 표현이 나타나고 종교적인 행위가 엿보이며 생계수단도 훨씬 다양화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신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에 인간이 거주하게 되는 시기이기 하다. 후기 구석기는 애초에 남프랑스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으며, 그 분포지역이 점차로 확산된다.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발견되는 석기공작이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출현하는 시기나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사하라남부의 아프리카지역에서는 이미 9만년 전에서 4만년 전 사이에 이러한 석기공작이 나타나고 4만년 전 이후가 되면 이보다 발달된 모드 5의 석기공작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중근동 지방의 석기공작에서는 4만년 전에서 2만년 전 사이의 석기공작은 후기구석기로 부르지만 2만년 전에서 1만년 전 사이의 석기공작은 후구석기문화라고 부른다.

후기 구석기시대의 기후는 오늘날과는 많이 달랐다. 빙하가 발달하여 북유럽, 알라스카와 캐나다를 덮고 있었다. 이러한 빙하는 약 2만년 전에서 1만 8천년 전 사이에 그 극성기를 맞이하였는데 대단히 춥고 강수량이 현저히 줄어든 기후를 만들었던 것이다. 고위도 지방에서는 삼림대가 남하하였으며 아마도 유럽지역에서는 지중해 연안에만 삼림이 남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라시아대륙의 많은 부분은 스텝지역이 되어 들소, 말, 매머드 그리고 순록 등과 같은 동물이 살 수 있었다. 저위도 지방에서는 건조한 기후가 나타나서 숲이 줄어들고 사막이 팽창하였으며 현재보다 훨씬 열악한 기후환경이 지배하였다.

유럽지역과 중근동 지방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로 대치되는 시기와 후기구석기가 나타나는 시기가 일치하여 후기구석기공작의 주인이 확실한 듯하지만, 실제는 고인류와 석기공작과의 관련성이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근동에서는 완전한 현생인류가 중기구석기시대의 석기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있고, 프랑스의 유적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이 후기구석기시대의 석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남아프리카지역에서는 후기구석기공작이나 현생인류의 상한이 다른 지역보다도 훨씬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머지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현생인류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특징적인 기술은 두께가 얇고 양측이 길고 날카로운 날을 가진 석인(石刃)을 제작하는 기술이다. 석인기법은 석재를 가장 경제적으로 이용할 수 있으며, 석재 단위당 가장 많은 사용날을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이다. 석인은 다양한 기술로 가공이 되는데 이들 기법에는 지극히 정교한 기술인 가압법(加壓法)이 포함되어 있다. 석기들은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다양한 종류의 긁개, 칼, 첨두기, 조각도, 톱날 등의 소형석기가 나타났으며, 시대와 유적의 기능, 그리고 지역에 따라 다양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도구를 제작하는 기법이 체계화되었을 뿐 아니라 도구를 만드는 재질 역시 다양화되었다. 뿔, 뼈, 상아 그리고 나무들이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뼈를 이용한 각종의 사냥 및 어로도구가 발달하였다. 뼈는 북쪽지방에서는 연료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집을 짓는데도 사용되었다.

석기들은 후기로 갈수록 작아지는 경향을 띠고 있으며 대략 2만년 전 이후가 되면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세형돌날문화가 나타난다. 이러한 기술은 석기 사용법의 변화, 즉 석기를 장착하거나 복합석기를 만들게 되는 것 등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이 석기제작에 사용된 석재에 대한 선호가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폴란드에서는 약 400㎞나 떨어진 곳의 플린트(flint)를 사용한 석기가 발견된 바 있다. 한국에서도 일부 유적의 흑요석은 수백 ㎞ 떨어진 백두산의 것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석기들은 중기구석기에 비해 휠씬 규격화된 것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끝긁개와 조각도이다. 후기구석기공작들은 지역적으로나 시대적으로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는 아프리카와 유럽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편이며 아시아나 오스트레일리아지역에서는 연구가 덜 진행된 탓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공작기법의 변화가 적은 편이다. 이러한 석기공작은 중기구석기시대의 석기공작과 일시적으로 공존하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점진적인 발달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지만, 신대륙이나 일본의 경우와 같이 급작스럽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어서 후기구석기인들이 다른 지역으로부터 이주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후기구석기인들의 경제생활은 기본적으로 사냥과 채집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미 사냥기술은 효과적으로 발달하였다. 예를 들어 창이나 화살 등으로 예전에는 추적하기 어려웠던 짐승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며, 또한 몰이사냥으로 대량수확도 가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지역의 주민들은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을 채집하였으며 지중해나 남아프리카지역에서는 이미 해안의 조개를 채집한 증거들이 발견된다. 그리고 사슴과나 솟과의 짐승을 사냥하는 동시에 야생의 곡물을 채집하였다.

북쪽 지역, 특히 유라시아지역의 스텝지역은 식량이 풍부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식물자원은 적었을 것이고 동물자원 역시 계절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물은 따뜻한 계절동안 무리를 지어 출현하였을 것이며 길고 추운 겨울에는 드물었을 것이다. 그래서 겨울을 보내기 위하여 식량을 저장하는 방법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들의 경제체계를 복잡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구석기인들은 자원에 대하여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계절적으로 이동하면서 이러한 자원을 이용하였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가능한 모든 식량자원을 이용하였지만 특정자원을 집중적으로 이용한 예도 볼 수 있다.

인간성의 발현도 이 시기의 중요한 변화이다. 예술품의 출현, 악기의 출현 그리고 여러가지 의식이 본격적으로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예술품에는 벽화와 조각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벽화는 프랑스, 스페인지역의 동굴벽화들이 잘 알려져 있으며 이외에도 사하라 남쪽지역의 벽화나 암각화들이 있으며 우랄산맥지역과 불가리아에서도 발견된 예가 있다. 한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시베리아 지역에 이르기까지의 지역에서 많은 조각품들이 발견되었는데 이중에는 흔히 비너스라고 부르는 대단히 추상화한 여인상 조각도 있고 동물상 조각품도 포함되어 있다. 돌, 호박, 뼈 그리고 상아 등에 조각한 것이 많지만 북쪽지역에서는 불에 구운 토제품이 나타나고 있다. 어떤 예술품에 나타나는 선각들은 아직 그 의미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 학자들은 달력이나 수를 표시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개인용 장신구들이 흔히 발견되는데 뼈, 조개, 상아, 돌, 호박, 이빨, 타조알 껍질 등을 가공하여 팔찌, 목걸이 그리고 관(冠) 등을 만들었다. 이는 개성의 표현이나 또는 사회적인 동질성의 표현을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북아프리카나 유럽에서는 짐승이나 새뼈로 만든 피리가 출현하고 있다. 한편 소련에서는 그림이 그려진 매머드의 뼈가 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것은 이미 중기구석기시대에 나타나지만 후기구석기시대가 되면 그 예가 크게 증가한다. 소련의 블라디미르시 부근의 숭기르 유적에서 발견된 두 사람은 각자가 3,000개 이상의 상아로 만든 구슬을 착용하고 있었으며, 이외에도 많은 의식용 물건들이 함께 발견되었다.

유적의 규모나 예술품이 출현과 매장풍습 등에서 볼 때 이 시기에 정치 사회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반적으로 저위도 지방에서는 이러한 증거들이 미약한 점으로 미루어 오늘날의 채집경제집단과 유사한 사회집단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위도 지방에서는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거주하게 되고 또한 계절적인 식량공급의 전략상 대단위 집단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이러한 증거들이 매장풍습에서 보다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반도에서도 돌날석기문화가 약 3만년 전경에 도입되었다고 추측되며 이전의 석기공작기법과 공존하면서 발달하였다. 함경도의 굴포리 유적, 공주 석장리 유적, 상무룡리, 수양개, 만달 동굴 등지에서 돌날석기공작이 발견되고 있으며, 이 중에는 이미 상당히 발달한 세형돌날 석기공작을 포함하고 있다. 한반도는 빙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에 북쪽 지방에서는 시베리아 동물군의 영향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추운 기후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황해의 대부분은 해수면 하강으로 인하여 노출되어 있어서 당시 인류의 서식지 범위가 현재와는 달랐을 것이다.

참고문헌

  • Encyclopedia of Human Evolution and Prehistory(Ian Tatterwall·Eric Delson·John Van Couver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년)
  • The Paleolithic Age(J.Wymer, 198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