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장리 유적

석장리 유적

[ 公州 石壯里 遺蹟 ]

지역 공주

충청남도 공주시 석장리동에 있는 선사 유적으로, 공주시에서 금강 상류쪽으로 5㎞ 거리에 있는 석장리 마을 앞을 흐르는 금강 둑에 유적이 있다. 사적으로, 지도상 위치는 북위 37˚20′, 동경 127˚21′이다. 1964년 11월에 연세대학교박물관 조사단에서 첫 발굴을 하였고, 1974년까지 해마다 1차례씩 10차에 걸쳐 발굴하였다. 1990년과 1992년에는 석장리 유적 전시관 건립을 위한 자료 수집을 목적으로 2차례 발굴하였다. 유적은 1지구와 2지구로 나뉜다. 석장리에서 처음 구석기 유물을 확인한 곳이 2지구이며 거기에서 하류쪽으로 200m 내려와 1지구가 있다. 1차 발굴에서 6차 발굴까지는 2지구를 중심으로 발굴하였고, 6차에서 12차 발굴은 1지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동안 12차에 걸친 발굴에서는 1지구에서 후기구석기시대 야외 집터 2기가 나타났고 여러 가지 석기들이 층위를 달리하여 나왔다.

유적이 위치한 석장리 지역은 좁은 골짜기 사이로 금강이 흐르고 있으며 강비탈에는 골짜기퇴적층이 강가를 따라 띠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이 퇴적층은 현재 금강 바닥보다 10m 이상 높이까지 발달하고 있으며 유적 주변은 더 가파른 편이다. 유적의 층위는 2지구에서 해발 12.6m 지점(1구덩)과 1지구 81구덩(해발 14.3m)을 기준으로 파악할 수 있다. 11~12차 발굴에서 기반암까지 발굴하여 나타난 81구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아래로부터 기반암-강바닥퇴적층-강가퇴적층-홍수퇴적층-비탈퇴적층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비탈퇴적층은 해발 10m 높이부터 나타나는데 산비탈을 따라 흘러내려 쌓인 층으로 찰흙과 모난돌로 이루어진 층이다. 비탈퇴적층은 해발 13m로부터 14.3m까지 찰흙으로만 이루어진 단단한 층을 이루고 그 안에 토양쐐기(soil wedge) 구조가 남아 있다. 토양쐐기 구조는 추위와 관련된 언땅트기 현상의 일종으로 해석되어 플라이스토세의 마지막 빙기에 나타난 것이며, 후기구석기시대의 한 표준 지층으로 보고 있다. 토양쐐기 현상이 나타나는 찰흙층에서 나온 나무숯으로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을 하여 20830 B.P.의 절대연대를 얻었다. 따라서 언땅트기 현상은 그보다 다소 늦은 시기인 17000 B.P. 전후에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찰흙층 아래에 있는 모난돌 포함층에서는 30690 B.P.와 50270 B.P.의 연대가 나왔다.

기준 구덩의 층위와 절대연대측정 자료들을 통해서 보면 유적의 층위는 크게 3번에 걸친 퇴적 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반암 바로 위에 쌓인 수성퇴적들은 마지막 빙기 이전의 간빙기 동안에 쌓인 것이고, 그 위에 쌓인 비탈퇴적은 마지막 빙기 동안에 쌓인 것이며, 찰흙층은 마지막 빙하기 후기에 쌓인 것으로 나타난다.

유적 발굴결과에 대한 보고는 그동안 여러 번의 중간 보고가 있었고, 1993년에 종합보고서가 나왔다. 2지구 1구덩에서는 기반암까지 발굴하여 나타난 결과를 바탕으로 모두 27개 지층에서 12개 문화층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12개 문화층은 가장 이른 시기의 1문화층(외날찍개 문화층)으로부터 토양쐐기가 나타나는 가장 윗층의 12문화층(돌날몸돌 문화층)까지 석기구성과 제작수법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층으로 구분하였다. 그 가운데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9문화층(자갈돌찍개 문화층) 아래에 있는 지층들에서 나온 것을 구석기시대 석기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석장리 유적의 이른 시기 문화층에서 나온 석기들은 대부분 석영 암질로 만든 것이다. 석영 석기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지층 구성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이르기까지 석장리 유적에서는 전기구석기 문화층의 존재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9문화층 아래에서는 발굴 면적이 좁고 출토 유물도 많지 않기 때문에 아직 뚜렷한 성격을 말하기는 어렵다. 11~12차 발굴에서는 1지구 81구덩에서 기반암까지 발굴하여 2지구 1구덩과 지층이 서로 연결되는 것을 확인하였고 기반암 위에 놓인 강가퇴적층에서 외날찍개를 비롯한 몇 점의 석기를 발굴하였다. 그러나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강물이 흘러들어와 넓은 면적을 발굴할 수 없어 그 이상의 문화성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석장리 유적의 전기구석기문화 문제는 이제까지 나타난 성과로 볼 때, 이른 시기층에서 석기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것이 문화층으로 존재하는지의 문제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후기구석기문화는 비교적 뚜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1지구 51구덩에서 1969년에 1호 집터가 나온 뒤에 89·90구덩에서도 집터의 흔적을 찾았지만 제대로 밝혀지지 못했다. 12차 발굴에서 다시 91~101구덩을 중심으로 집터가 1기 나와 3호 집터로 이름하였다. 1호 집터는 강쪽을 바라보는 비탈진 곳에 있었고 집안에 화덕자리(爐址)가 있다. 3호 집터는 강흐름과 나란한 방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으며 집밖에 화덕자리가 있었다. 1호 집터는 겨울철 살림을 위한 것이고 3호 집터는 여름철에 이용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3호 집터에서 나온 나무숯을 분석한 결과 상수리나무와 단풍나무로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풀을 엮어 지붕으로 덮었던 구조임을 알 수 있었다.

후기구석기 문화층에서는 석기 구성이 다양한 편이다. 석기의 바탕돌은 석영을 비롯해 반암, 규암, 유문암, 편마암, 흑요석 등 여러 가지 돌을 이용하였다. 제작 수법에서는 돌날떼기 수법과 오리냐시얀식 잔손질 수법도 보인다. 세형돌날 떼기 제작수법은 후기구석기시대부터 나타나며 가장 윗층에는 중석기 문화층도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중석기 문화층은 12차 발굴에서 뚜렷이 나타났는데 지층 구성에서 찰흙층 위에 산화망간층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중석기 문화층에서는 세형몸돌과 함께 수정으로 만든 새기개, 작은 격지들도 많이 나왔다.

참고문헌

  • 석장리 선사유적-11·12차 발굴보고-(손보기 외, 1994년)
  • 석장리 선사유적(손보기, 1993년)
  • 층위를 이룬 석장리 구석기 문화(손보기, 역사학보 35·36, 196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