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형돌날문화

세형돌날문화

[ 細石刃文化 ]

동아시아 후기구석기시대에 나타나는 석기제작기술의 한 유형으로, 세형돌날 몸돌은 30000년 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말기 구석기(15000년 전경)에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나갔고, 신석기시대에도 일부 지역에서 쓰이고 있으며 청동기·철기시대까지도 드물게 나타난다. 서유럽의 말기 구석기, 중석기문화(azilian, tardenoisian)를 대표하는 석기가 기하학적인 세석기(細石器)인 데 비해 그와 같은 시기에 동아시아에서는 세형몸돌이 하나의 표지 유물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공주 석장리 유적에서 처음 알려진 이후 평양 만달리 유적, 단양 수양개 유적, 제원 창내 유적, 양구 상무룡리 유적, 하화계리, 곡성 옥과 유적, 금평 유적, 화순 대전 유적, 임불리 유적, 부산 해운대 중동 유적에서 나왔다. 앞으로 한반도 전역에 걸쳐 더 많은 유적에서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한국에서 세형돌날몸돌을 내는 유적은 대체로 구석기시대 늦은 시기에서 초기신석기시대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이제까지 동아시아의 세형돌날몸돌에 대한 연구는 크게 3가지 방향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세형돌날 몸돌의 기원에 관한 것, 제작수법과 형식분류에 관한 것, 유물의 분포와 아울러 문화의 이동과 나아가서는 인류 이동에 관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세형돌날 몸돌의 분포는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북아메리카로의 인류 이동과 관련하여 일찍부터 관심과 주목을 받아 왔다.

이제까지 나타난 결과는 세형돌날몸돌 제작기술이 대략 30000년 전경 북중국(북위 40˚부근, 흑룡강과 황하 사이)에서 나타나 고위도 지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베링 육교나 캄자카 반도를 건너 북아메리카로 들어갔고 한편으로는 북해도를 거쳐 일본으로 흘러가고, 한편으로는 중국 남부와 한반도에까지 분포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특히 일본 열도로의 확산 과정에 한반도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세형돌날문화의 기원에 관하여는 중앙아시아 기원설, 북중국 기원설, 극동 기원설로 나뉘어지고 있다. 중앙아시아 기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를 세형돌날몸돌의 제작 기술에서 찾는다. 이 몸돌이 앞선 시기의 르발루아격지 떼기기술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아 세형돌날 제작기술은 동몽골에서 르발루아기법으로부터 발전한 것으로 보았다.

한편 북중국의 峙峪 유적에서 세형돌날몸돌이 나오면서 북중국 기원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峙峪 유적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격지 석기들이 많으며 큰 석기(몸돌 석기)들도 함께 나오고 있는데, 이곳에서 나온 세형돌날몸돌은 제작 수법상 원시적인 형태를 보인다. 峙峪 유적의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중국학자들은 이 몸돌의 기원지를 북중국으로 주장하게 되는데, 중국에서는 이미 이른 구석기시대부터 구석기문화에 2가지 전통이 있어 匼河-丁村계통의 큰석기 전통과 周口店-峙峪 계통의 세석기 전통으로 나누고 이 몸돌은 세석기 계통의 석기 제작기술에서 발전해 나온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峙峪 유적의 연대가 세형돌날몸돌이 나온 유적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들어 있고 내몽고 살라우슈 유적(35000 B.P.)에서도 이 몸돌이 나와 그 기원이 북중국에 있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 유적들에서 출토된 세형몸돌의 형식이나 그와 관련된 부산물이 없다는 것은 우연한 경우에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바이칼호 동쪽(trans-Baical) 지역의 30000~35000 B.P.에 해당하는 유적에서도 세형몸돌 제작 수법이 나타난다. 따라서 세형돌날 석기제작기술의 기원지를 보다 넓은 지역에서 검토해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쵸르느이 아누이 유적, 우스트-카라콜 유적, 톨바가(Tolbaga) 유적 Ⅳ층(절대연대 34860 B.P./27210 B.P.), 소스노브이보르(Sosnovy Bor) 유적 Ⅴ층에서 세형돌날몸돌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세형돌날몸돌의 기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른 시기의 몸돌이 나오는 유적들을 대상으로 석기 제작기술의 등장 배경으로서 생태환경에 관한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

세형돌날 석기제작기술의 특징은 연모를 대량으로 제작할 수 있다는 점과 다양한 석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세형돌날로 만든 석기는 작은 날을 여러 개 끼워 복합 도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형태의 연모를 만들 수 있다. 세형돌날로 만든 석기의 기능은 주로 어로, 채집과 관련되어 있다. 뼈나 뿔 또는 나무자루에 끼워 칼이나 낫의 기능을 할 수 있는 복합 도구를 만든 것이 있다. 중국의 세석기 유적들은 사막, 스텝, 호숫가 등에 생태적 적소를 갖고 있다. 세형돌날 석기는 앞선 시기의 다른 유형의 석기들(등자르개-backed knife-나 소형 나이프)을 대신하여 그것들과 같은 기능을 하면서 석기 유형에 변화를 보이는 것인데, 그것은 연모의 다양화와 더불어 대량 제작의 필요에서 나타난 결과였다.

연모의 다양화와 대량 제작은 당시의 생업 활동이 다양해졌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세형돌날 석기와 함께 나오는 석기 갖춤새들을 보면 창끝찌르개, 화살촉, 뼈낚시 등 생업과 관련한 도구들이 많고 한편으로는 몸돌 석기도 보인다. 후기 구석기시대의 격지 석기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연모의 전문화와 다양화 경향을 보인다. 세형돌날 석기라는 새로운 석기 형태의 등장은 바로 연모의 전문화·다양화라는 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생태환경의 변화에 따른 연모의 전문화 과정에서 연모 제작기술의 발달을 낳게 된다. 세형돌날 석기는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전문화된 석기 유형이다.

북중국의 점이지대를 배경으로 나타난 세형돌날 석기는 북쪽의 초원 환경으로 퍼져 나가면서 넓은 지역에 걸쳐 초원 적응형 석기로서 기능을 하고, 특히 어로·채집과 관련된 연모로서 기능을 한 것이다. 15000년 전을 전후한 시기에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어 간 것이고, 그 시기는 털코끼리-털코뿔소 동물군이 서서히 북쪽으로 밀려가는 시기로 사냥 대상물의 제한은 물고기 자원과 야생 식물에의 의존도가 점차 높아지는 시기이며, 바로 그와 같은 생태계의 변화는 세형돌날 석기의 쓰임새가 높아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참고문헌

  • 동북아시아 후기구석기 최말기의 성격과 문화변동에 관한 연구(이헌종, 한국고고학보39, 한국고고학회, 1998년)
  • 東北아시아 세형돌날 문화의 起源問題에 대한 試考(이헌종, 박물관연보5, 목포대학교박물관, 1997년)
  • Hunting, Fishing and Gathering in Pacific Northeast Asia : Pleistocene Continuities and Holocene Developments(C.M.Aitkens, Pacific Northeast Asia in Prehistory, 1992년)
  • 동북아시아 후기구석기와 신대륙으로의 인간 이주에 관한 소고(李鮮馥, 韓國考古學報 16, 한국고고학회, 1984년)
  • Northeast Asia in Prehistory(C.S.Chard, 1974년)
  • Late Pleistocene Vegetation History(V.P.Grichuk, Late Quaternary Environments of the Soviet Union, 1984년)
  • 東北アシアの 細石刃技術(林謙作, 日本考古學 古代史論-伊東信雄還曆記念, 1974년)
  • 山西峙浴舊石器遺址發掘報告(賈蘭坡 外, 考古學報 72-1, 197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