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내 유적

창내 유적

[ 堤原 - 遺蹟 ]

지역 제원

충주댐 수몰지구인 충북 제원군 한수면 사기리(현재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에 위치한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으로, 1982~1983년 2차례에 걸쳐 약 250㎡를 발굴하여 후기구석기 문화층을 확인하였다. 층위는 표토층까지 합하여 7개의 층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래로부터 2지층(모래층)에 후기구석기시대의 문화층이 있음이 보고 되었다. 그리고 제1층은 강자갈층이다. 그 위로 3지층은 점토층, 4지층은 고운모래점토층, 5지층은 고운모래층, 6지층은 부토층, 7지층은 표토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4기 지층 아래의 백악기의 암석은 석영맥암, 석영반암, 화강반암, 백운모화강암 및 흑운모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유적은 지리적 위치상 본래 강의 범람이 잦았고 하천활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장소여서 재퇴적의 가능성이 많은 유적이다. Ⅲ문화층은 무문화층이고 Ⅳ문화층은 빗살무늬토기붉은간토기(紅陶)가 섞여 나온 것으로 보아 교란된 지층이다. 실제로 강의 여러 작용으로 인하여 영향을 받는 유적들은 그 층위관계가 대단히 미묘하여 해석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 유적의 경우 발굴한 사진을 통하여 볼 때 후기구석기시대의 유구는 표토에서 불과 얼마되지 않은 깊이에서 드러났고 1층 자갈층과 면하여 나타나고 있다. 후기구석기의 층위는 수성퇴적에 의한 층이 많기 때문에 강의 작용여하에 따라 층위가 소실되고 재퇴적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2층위의 자갈층에 면하여 형성된 유구층은 범람으로 인하여 계속된 층위들이 일부 소실되고 그 과정에서 유물들이 자갈층에 깔린 양상으로 볼 수 있어서 지층 분석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이 유적에서는 5,000여 점의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발굴면적에 비해 많은 양의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물은 석영질 석기가 64%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퇴적암과 화산암의 자갈 및 조각으로 만든 석기가 대부분이다. 퇴적암으로는 사암, 혈암(shale) 등이며 화산암으로서 유리질인 흑요석이 발견되었다.

도구와 공구로 분류된 석기의 수는 각각 514점과 268점이다. 도구 514점 중에는 몸돌석기가 119점(23%)인데 찍개류, 양면석기류, 사냥돌 등이다. 양면석기는 중형화와 정형화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격지석기는 긁개류(181점)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그 밖에 자르개, 째개, 톱니날, 홈날, 새기개 등의 석기구성을 이루고 있다. 보고자는 이러한 양상을 후기구석기의 한 특징으로 보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석기와 격지 및 부스러기를 포함해서 7점의 흑요석도 출토되었다. 또한 돌날의 양끝을 단순절단해서 중간부분이 남은 흑요석제 석기도 수습되었다. 그러나 긴 돌날떼기에 의한 끝날긁개 제작은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박편석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보고된 둥근 긁개는 청원 샘골 유적의 석기와 같이 직접떼기에 의한 단순한 제작기법에 의해 한쪽 끝 혹은 둘레에 배면에서 등면으로 타격하여 제작되었고, 보통 배면은 격지를 떼어낼 때 있으며 그대로 두는 경향이 있다. 이 둥근긁개는 제작방법이 단순하여 석재에 제약을 받지 않았다. 20점의 둥근 긁개는 창내 유적의 독특한 석기로서 수양개의 슴베찌르개 만큼 한반도의 독특한 석기이며, 정형의 석기모양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유적의 대표적 석기가 된다. 둥근 긁개는 앞으로 다른 유적에서 이와 유사한 석기가 출토되면 그 분포를 중심으로 하여 유적간의 문화적 연관관계를 밝혀나가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유적의 주요 유물은 단일목적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 용도를 정확하게 밝혀볼 수 있는 정교한 석기들 가운데 석영제 석재를 이용한 석기의 수량은 현저히 떨어지고 있지만 석영제 석재를 활용하여 잔손질을 베풀어 석기를 만든 것도 부분적으로 보인다. 이것은 새로운 잔손질 기술이 석영질 석재에도 부분적으로 적용된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현상은 청원 샘골 유적의 석기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긁개문화라고 보고할 만큼 둥근 긁개가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총 끝날긁개 수 70점 가운데 20점(30%)이 둥근 긁개이다. 창내 유적에서 강조되는 것은 지상가옥의 막집터의 존재이다. 그러나 막집터의 존재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異見)이 있다.

이 유적에서는 석영제 석재가 아닌 새로운 석재로 새로운 기법을 적용하여 석기를 제작하였다. 석재로는 유적 부근에서 쉽게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다 정교한 석기를 제작할 수 있는 혈암(shale) 등의 퇴적암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부족한 석재는 석영암에 의존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석기제작 기법은 이 유적 부근에 위치한 수양개 유적과 비교하여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으나, 돌날제작기법이 아직 본격적으로 채택되지 않고 있으며 그 수량도 8점에 불과하다. 또한 배모양의 긁개(1점) 혹은 세형돌날몸돌(3점)의 출토가 빈약할 뿐 아니라 전형적인 돌날몸돌이나 배모양긁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수양개보다는 이른 시기의 유적으로 보인다. 보고자는 이 유적의 연대를 둥근긁개의 형태와 오리냐시안 잔손질 등의 제작기법을 근거로 후기구석기 중기로 판단하고 있다.

참고문헌

  • 제원 창내 후기구석기 문화의 연구(박희현,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년)
  • 충북 제원군 창내유적의 문화성격(박희현, 호서문화논총 2, 1983년)
  • 제원 사기리 C지구 창내유적 발굴 약보고(박희현·이융조, 82충주댐 수몰지구문화유적발굴조사 약보고서, 198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