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이쇠

덩이쇠

[ 鐵鋌 ]

부산 복천동ㆍ두구동, 합천 옥전 출토. 길이(左) 44.5cm

부산 복천동ㆍ두구동, 합천 옥전 출토. 길이(左) 44.5cm

철기의 제작을 위해서는 제철로(製鐵爐)에서 만들어진 철괴(鐵塊)가 일정한 형태를 갖추어 단조철기(鍛造鐵器)를 제작하는 단야공방(鍛冶工房)에 공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삼국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철제유물 중 제1의 후보가 되는 것이 가운데가 좁고 양쪽이 넓은 장방형(長方形)의 철판인 덩이쇠(鐵鋌)이다.

낙동강 하류역을 중심으로 가야지역과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지역에서는 대체로 4세기 이후 전형적인 형태의 철정이 출토되며, 5세기대 이후에는 창원, 마산, 함안, 의령, 고성 등지에서도 출토된다. 이외에도 서산, 서천, 공주, 대전, 부여 등의 충청도 서남부지역과 영암, 영광, 해남 등의 전라도지역에서도 전형적인 철정이 출토된다.

그 이전인 1∼3세기대에 있어서 철정과 동일한 기능을 가진 것으로서 판상철부(板狀鐵斧)를 들 수 있다. 판상철부는 함경북도 무산 호곡 유적, 황해북도 갈현리 유적, 사천 늑도 유적 등에서도 출토되지만, 경주 입실리·구정동 유적, 경산 임당 유적, 대구 팔달동 유적, 창원 다호리 유적 등에서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초기의 판상철부는 대소의 크기 차이가 있고 특히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는 2종류의 목제병(木製柄)에 착장된 채로 출토되어 철부(鐵斧)로서의 기능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창원 다호리 유적과는 달리 2∼3세기대의 유적인 김해 양동리 유적에서는 235호 목곽묘 30매, 162호 목곽묘 40매, 280호 목곽묘 10매 등 10매단위로 묶여서 출토되었으며 경주 사라리 130호분에서는 70매가 출토되었다. 김해 양동리 유적에서 출토된 판상철부는 판상(板狀)과 봉상(棒狀)의 2종류가 있다. 형태적으로는 창원 다호리 1호분의 판상철부 및 봉상철부와 유사하나, 출토상태로 보아 철부의 기능이 상실되고 철정의 기능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단조철부가 제작되면서 판상철부는 철부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간 것이다.

이러한 판상철부는 4세기대에 그 형태가 완전히 변화한다. 외형적인 형태는 판상철부와 유사하나 전체적인 너비가 넓어지고 인부(刃部)에 날이 만들어지지 않는 등 변화가 보인다. 판상철부라기 보다는 판상철부형철기(板狀鐵斧形鐵器)라고 해야 할 것이다. 판상철부형철기는 경주, 김해, 부산 등지에서 출토되는데 판상철부의 출토지와 비교해 특정 고분군에만 한정되어 출토된다. 특히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는 그 현상이 확연하다.

4세기 후반이 되면 전형적인 철정의 형태가 나타난다. 가운데가 좁고 양쪽이 넓은 철판의 형태를 띠는 것이다. 김해 대성동(大成洞) 고분군에서는 두께 4∼5㎜정도의 전형적인 철정과 함께 너비 5∼8㎝, 두께 1㎝ 정도의 철정도 출토되었으며, 동래 복천동(福泉洞) 54호분에서는 판상의 철정과 함께 봉상철기도 출토되었다. 철정에 있어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5세기대 동래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철정은 어느 정도 규격성(規格性)을 가지고 변화한다. 이러한 규격성은 소지역성을 가지는 것으로 전 지역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주지역에서 출토되는 철정은 규격에 있어 다양성을 보인다. 생산체계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5세기 중엽까지의 철정은 대체로 40㎝ 이상의 대형이 주류를 이루지만 5세기 중엽 이후 점차 소형화되어 간다. 6세기대에는 부산 두구동 임석 6호분의 철정과 같이 길이 4.5㎝, 너비 1.5㎝전후로 소형화한다.

철정의 용도는 크게 철소재설(鐵素材說)과 화폐설(貨幣說), 매지권설(買地券說), 위신재설(威信財說) 등이 있다. 철정에 대한 금속학적인 분석결과, 무수한 단타(鍛打)에 의한 여러 겹의 상태, 결정립미세(結晶粒微細), 함탄량(含炭量)이 낮은 고순도의 강(鋼) 등의 특징과 함께 자연냉각(自然冷却) 및 비열처리 등 도구로서의 강인함을 고려하지 않은 점 등으로 보아 철정이 철기 제작을 위한 중간소재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2세기대 이후 10의 배수 부장, 일정한 형태와 규격성, 5세기 이후 소형화 추세 등은 화폐로서의 기능이 강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 변진조(弁辰條)의 “시장에서 중국의 돈과 같이 사용되고 낙랑군과 대방군에 공급했다”는 기록은 철이 실물화폐로서의 기능과 함께 철기 제작을 위한 중간소재로서의 기능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분묘(墳墓)에 부장된 철정은 철소재와 화폐 등의 용도 외 매지권과 위신재의 성격도 가지고 있으므로, 철정의 용도를 한정지어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철정과 함께 철소재로서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서 주조철부와 봉상철기가 있다. 주조철부(鑄造鐵斧)는 공구(工具)로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합천 옥전 M3호분, 경주 황남대총(皇南大塚) 남분 등의 분묘에서 출토된 주조철부는 범심(范芯)이 제거되지 않은 것이 많아 실용공구로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며, 철정과 함께 철기제작의 중간 소재로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철(銑鐵)로 제작된 주조철부를 이용하여 단조철기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재용융(再熔融)과 탈탄과정(脫炭過程)을 거쳐야 하므로 단조제품인 판상의 철정에 비해 많은 공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주조철부는 철기제작의 중간소재라기보다는 화폐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합천 옥전 M3호분과 황남대총에서 봉상철기가 출토되었다. 합천 옥전 M3호분의 봉상철기는 길이 5.4∼22.0㎝, 너비 0.8∼3.1㎝, 두께 0.7∼3.0㎝이며, 다양한 크기로 인하여 철소재로서 여러 가지 기종을 가공할 수 있어 철정보다 철소재로서 보다 적합한 것이다.

참고문헌

  • 倭人と鐵の考古學(村上恭通, 靑木書店, 1998년)
  • 낙동강하류의 고대철생산 가야제국의 철(송계현, 가야연학술총서 1, 인제대학교가야문화연구소, 199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