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제작

철기제작

[ 鐵器製作 ]

철광석(鐵鑛石) 또는 사철(沙鐵)로부터 철을 추출하는 제철과정(製鐵過程)과 이를 이용하여 도구를 만드는 야철과정(冶鐵過程) 등을 통틀어 일컫는다.

지구상에 인류가 처음 철을 발견하여 사용한 것은 고온의 환원 기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운철(隕鐵)과 같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철을 두드려 이용한데 지나지 않는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고온 환원기술에 의해 얻은 철을 단조하여 본격적으로 철기를 사용하게 된 지역은 소아시아라고 추측되고 있는데 그 상한 연대나 그와 관련된 제철유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B.C. 2000년대 후반에서 B.C. 1000년까지의 시기가 되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실용철기들이 보편화되고, 그리스반도를 거쳐 유럽으로 확산되는 시기도 이 무렵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철기를 만드는 과정은 제철과정(1차 공정)과 철기 제작과정(2차 공정)으로 나누어진다. 즉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제련공정, 추출된 철을 이용하여 철제품을 생산하는 용해(鑄造)와 단야(鍛造)공정으로 나누어진다.

철광석은 광산에서 채취하는 철성분이 많이 포함된 광물로서 대체로 500~600˚C에서 환원되고, 1,000˚C 이상의 온도에서 일정시간 경과하면 탄소함유량이 많은 철이 생산된다. 철광석은 일정한 크기로 잘게 부수어 선별을 하며, 미리 예열을 하여 노(爐, furnace) 안에 넣기도 한다. 제철연로로는 목탄과 석탄이 사용되는데 고대에는 주로 목탄이 사용되었다.

제철기술(製鐵技術)은 채광된 원료를 가져와 녹여 철을 추출하는 제련공정(製鍊工程)에 의해 진행된다. 제련를 위해서는 우선 제련로(製鍊爐)가 필요하며 이와 함께 숯과 송풍시설(送風施設)이 필수적이다. 제련로에서 추출되는 철은 모두 일정하지 않다. 따라서 제련된 철은 분류작업을 통해 다음의 몇 단계로 세분되어 철기의 생산이 진행된다.

제련로에서 나온 철은 그 탄소(炭素) 함유량에 따라 연철(鍊鐵 : 塊鍊鐵), 강철(鋼鐵), 선철(銑鐵)로 구분된다. 연철과 강철은 바로 단야로(鍛冶爐)에서 철기생산이 가능하지만 선철은 별도의 과정을 거쳐 생산된다. 그러나 탄소함유량 2.1% 이하의 강 계통의 철은 고대의 기술로는 얻기 힘든 기술로서 대부분의 제련과정에서 나오는 철의 종류는 괴련철 또는 선철의 형태로 생산된다. 따라서 고대 제철은 괴련철 또는 선철을 이용하여 다음 공정인 용해, 정련, 단련의 과정을 통해 철기가 제작되었다.

2차 공정인 철기 제조과정에서는 용해로(溶解爐), 단야로(鍛冶爐) 등이 사용된다. 용해로(溶解爐)는 주조의 철기를 만들 때 사용되는 노이다. 주조(鑄造)란 용해로에서 만들어진 뜨거운 쇠물을 미리 제작된 거푸집(鎔范)에 부어 제품을 만드는 방법을 말한다. 따라서 용해로 주변에는 거푸집이 많이 출토되는데 거푸집은 고온에도 뒤틀리지 않도록 모래를 섞은 진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쇳물이 닿았던 부분은 모두 회색으로 변해있다. 용해로에는 거푸집 이외에도 안틀과 도가니 등이 함께 출토된다. 안틀(范芯)은 쇠도끼에 끼울 나무자루 구멍을 마련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고, 도가니는 쇳물을 담아 거푸집에 붓는 용기이다.

단야로(鍛冶爐)는 단조의 철기를 만드는 곳이다. 즉 단조(鍛造)는요즘의 대장간과 같이 철괴를 반용융상태로 달구어 망치로 두들겨 원하는 형태의 철제품을 만드는 방법이다. 이는 정련단야와 단련단야로 구분하기도 한다. 정련단야(精練鍛冶)는 선철 중 탄소함유량이 높은 것을 재가공처리하는 단계로 제품을 만들기 위한 중간소재로 만드는 공정이며 직접 제품을 제작하는 단계가 단련단야(鍛鍊鍛冶)이다. 그러나 실제 정련단야와 단련단야는 노의 구조나 출토유물의 비교를 통해서는 거의 구분되지 않는데 출토된 철재나 철괴의 분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단련, 정련과 관련된 단야유구는 노의 구조상 매우 간단한 시설로 보인다. 이와 관련된 작업도구에는 집게, 망치, 모루, 끌, 숫돌 등이 있다.

서양에서 실용철기의 제작기술이 발전하고 보급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제철유적이 발견되고 조사된 사례는 별로 없다. B.C. 5~4세기대, 그리스 채색도기(彩色陶器)에 묘사된 긴 샤프트형로(shaft形爐)와 작업광경은 제철 작업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중요하다. 그런데 인류 최초의 제련로라면 원형수혈로(圓形竪穴爐 : bowl furnace)와 같은 형태일 것이라고 추측되지만 아주 이른 시기의 것으로 명확한 형태가 발견되는 않는다. 이탈리아 포풀로니아(Populonia) 근처 바라티(Baratti)해안 유적에서 발견된 원형수혈로는 B.C. 170년 정도로 연대가 추정된다.

중국에서 실용철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는 춘추시대(春秋時代)부터 이지만 본격적인 제철유적은 한대(漢代)부터 발견된다. 지금까지 전한(前漢) 및 후한대(後漢代)의 제철유적으로 발굴된 것은 30개소를 넘고 있는데, 이 중 과반수가 하남성(河南省)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한대에는 중앙정부가 철을 전매하였기 때문이며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철관(鐵官)의 이름이 철기에 찍혀 있기도 하였다. 특히 하남성 일대의 대규모 제철유적 중에는 10만㎡에 달하는 것도 있다.

대표적인 유적인 하남성(河南省) 鞏縣의 鐵生溝 유적은 2만㎡에 달하는 면적에 제련로(製鍊爐), 용해로(鎔解爐), 초강로(抄鋼爐), 주철탈탄로(鑄鐵脫炭爐) 등이 밀집되어 있는 거대한 제철소이다. 하남성 제1의 제철유적인 古滎鎭 유적은 약 12만㎡의 범위에 형성된 유적이며 그 안에는 거대한 샤프트형로를 비롯한 각종의 노적(爐跡), 철광석 야적장, 주철기(鑄鐵器) 생산에 필요한 도범(陶范), 내화벽돌, 도제송풍관(陶製送風管), 목탄 등과 그것을 제작했던 공방도 발견되었다. 이 외에도 저명한 한대 제철유적으로는 역시 하남성의 瓦房壓·招賢村 유적과 강소성(江蘇省)에서 발굴된 동한시기(東漢時期) 利國驛 유적 등이 있다.

한국의 초기철기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철기의 형식이나 제철기술은 그 기원이 전국시기(戰國時期) 말까지는 올려 볼 수 있지만, 그 이후 철기시대 후기 혹은 삼국시대의 발달된 제철(製鐵), 제강기술(製鋼技術) 및 주철기(鑄鐵器) 제조기술의 기원은 한대의 기술에 둘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제철기술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대 제철유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현재 한반도에서 발견된 제철유적으로서 제련·용해·단야 등 철원료로부터 철을 생산하여 철기를 제작하기까지 일련의 공정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은 충북(忠北) 진천군(鎭川郡) 석장리(石帳里) 유적 뿐이다. 석장리 유적에서는 제련로로서 서구(西歐)의 bowl furnace와 같은 원형수혈로(圓形竪穴爐)와 함께 상형로(箱形爐)도 발견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특히 철원료로서 철광석 뿐 만 아니라 사철(沙鐵)과 같은 종류의 것도 사용했음이 밝혀졌고 철·철기생산과 관련된 일련의 공정이 일정 공간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음이 분명해졌다.

이 유적의 상한연대는 3세기 말경까지 올라가리라 추측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유적은 경주시(慶州市) 황성동(隍城洞) 유적으로 제련로가 뚜렷하게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단조철기를 제작했던 단야로(鍛冶爐)와 공방흔적 등을 비롯해서 주철기를 제작한 흔적인 용해로와 주조철부도범(鑄造鐵斧陶范), 폐기장 등이 확인되었다. 반드시 제철유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초기철기시대부터 한반도 곳곳에서는 철·철기제작과 관련된 시설물과 흔적이 발견된다. 이들 유적에서는 흔히 송풍관조각, 철찌꺼기가 발견되고 목탄과 함께 작은 노지(爐址)가 노출되기도 한다. 가평 마장리(馬場里) 유적과 이곡리 유적(梨谷里) 유적, 양평 대심리(大心里) 유적, 성산패총(城山貝塚), 고성패총(固城貝塚) 등지에서 그러한 양상이 확인된 바 있다. 최근에는 좀더 면밀한 발굴조사를 통해 노벽파편(爐壁破片)과 함께 단야작업(鍛冶作業)의 적극적인 흔적인 소형철괴와 소형철편 등이 주거지 내부에서도 확인되었고 심지어는 단야도구까지 출토된 유적도 있다.

이러한 양상은 취락단위의 수준에서 단야작업이 행해졌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당시 사회 내에서 철생산과 철기제작이 어떠한 생산분배체계에서 이루어졌는지 알아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즉 철의 생산은 석장리의 예로 보아 큰 규모의 생산시설에서 이루어지지만 단야작업은 취락단위로 철소재나 중간제품을 구해 간단한 시설에서 행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성격의 단야공방(鍛冶工房)은 한반도 중부이남 각처의 원삼국·삼국시대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과연 언제부터 그러한 단야공방이 나타나는 것일까 하는 문제는 앞으로 계속 검토되어야 하겠지만 동래 복천동 내성(萊城) 유적의 경우처럼 무문토기 말기의 주거지에서 확인된 예가 있어 B.C. 2세기경까지 상한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韓半島 中·南部地方 鐵器生産遺蹟의 現狀(孫明助, 嶺南考古學報 22, 嶺南考古學會, 1998년)
  • 鐵의 역사(국립청주박물관, 1997년)
  • 慶州 皇城洞 鐵器製作遺構(이영훈, 제34회 전국역사학대회 발표요지, 1991년)
  • 三國時代 鐵器遺物의 金屬學的 硏究(윤동석, 고려대 출판부, 1989년)
  • The Early History of Metallurgy in Europe(R.F.Tylecote, Longman, 1987년)
  • 東アジアの 初期鐵器文化(潮見浩, 吉川弘文館, 1982년)
  • 河南漢代冶鐵技術初探(河南城博物館 外, 考古學報 1978-1, 197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