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도끼

쇠도끼

[ 鐵斧 ]

합천 옥천 M3. 길이(右) 28cm

합천 옥천 M3. 길이(右) 28cm

도끼는 철제연모의 하나로 공구로서의 의미가 크지만, 당시에는 무기로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도끼에는 주조쇠도끼(鑄造鐵斧)와 단조쇠도끼(鍛造鐵斧)로 나누어진다. 한국에서 처음 발견되는 쇠도끼는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와 관련이 있는 주조쇠도끼이다.

주조쇠도끼(鑄造鐵斧)는 주형(鑄型)을 이용해 제작되는 것으로 청동기유물과 함께 발견되었다. 즉 황해도 봉산 송산리와 평북 위원군 용연동 유적에서 철제이기(鐵製利器)와 함께 발견되었다는데 이 유적에서는 전국시대 명도전(明刀錢)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를 근거로 북부지역에서 철기가 B.C. 4~3세기에 유입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남부지역에서도 부여 합송리나 장수 남양리 유적에서도 각기 주조쇠도끼가 청동기와 함께 발견되어 B.C. 2세기경에는 철기가 유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출토 예로는 김해 양동리 2호, 저포리 A40호, 제주 용담동 출토품이 있다. 이들 주조쇠도끼는 길이와 날 너비의 비율이 2 : 1 이하가 많고 측면형태는 이등변삼각형을 나타낸다. 이들의 형태로 보아 종방향 또는 횡방향의 기능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며 공구(工具)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남부지역 고분에서 발견되는 주조쇠도끼 중에는 주조괭이로도 불러지는 형식이 있는데, 이는 종단면이 이등변삼각형이 아니라 직각삼각형을 띤다. 또 공부의 횡단면도 사다리꼴을 한다. 이러한 단면형태를 자루의 착장과 관련시켜 볼 때, 횡방향의 기능이 가능하나, 종방향의 기능은 행하기 어렵다고 보이는데 날의 마모형태를 고려하면 자귀의 역할보다는 경작용농구(耕作用農具)의 기능을 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단조쇠도끼(鍛造鐵斧)는 주형(鑄型)을 이용하지 않고 임의로 두드려서 제작한 것으로 철기시대로부터 제작되었는데 고분기에 주류를 이룬다. 해남 군곡리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단조쇠도끼를 보면 얇은 철판을 구부려 합친 후 두드려서 제작한 것으로 인부는 반월형을 이루고 투겁은 좁은 장방형을 이르는데 크기는 길이가 5~6㎝의 소형이다. 제원 도화리 돌무지무덤 출토품은 공부와 인부 사이의 간격이 줄어들고 인부의 폭이 넓어진 것으로서 공부의 단면상 타원형 또는 각이 진 타원형을 띠는 형태이다.

김해 양동리 출토품은 인부(刃部)를 제외한 신부(身部)의 평면 형태 및 공부(銎部)의 단면이 장방형을 띠고 있으며 날의 너비가 넓어진 형태이다. 이들 단조쇠도끼는 도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고 본다. 단조쇠도끼는 주조쇠도끼 보다는 발달된 기술로 제작되었으며 훨씬 강하기 때문에 벌체용으로 적합한 도구이다. 다만 크기에 따라 큰 나무를 찍을 때 큰 단조쇠도끼가, 정밀한 작업을 할 때 작은 단조쇠도끼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밖에 판상쇠도끼(板狀鐵斧)가 있는데 철기시대 초기에 창원 다호리, 경주 조양동, 구정동, 삼천포 늑도 등 영남지방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다호리 출토 예와 같이 도끼 또는 자귀와 같은 형태로 나무자루에 삽입되어 출토되는 경우가 있어 그 기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판상쇠도끼는 철의 소재로서 덩이쇠(鐵鋌)의 역할을 하거나 화폐의 대용으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참고문헌

  • 鐵製農具에 대한 考察(千末仙, 嶺南考古學 15, 嶺南考古學會, 1994년)
  • 原三國時代文物展(慶北大學校博物館, 199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