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리 돌무지무덤

도화리 돌무지무덤

[ 堤川 桃花里 積石墓 ]

지역 제천

충북 제천시 청풍면(淸風面) 도화리 남한강변에 자리한 돌무지무덤으로, 충주댐이 건설되어 수몰됨에 따라 1983년에 조사되었다.

유적은 동남-서북으로 흐르는 남한강 동안의 넓은 사구 위에 1기의 돌무덤이 있으며, 유적 서쪽으로 강건너에는 월악산이 보이고 있다. 이는 자연적인 모래 언덕을 이용하여 그 위에 냇돌(川石)로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는데, 붕괴되어 구조가 확실치는 않지만 사구 위에 2겹 정도 돌을 쌓은 다음 그 위의 중심부에 4-5겹 가량 돌을 쌓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에 대해 보고자는 3단의 기단식 구조 상부에 있는 장대석을 돌덧널(護石)로 보았으나, 돌무지 상태로 보아 정형화된 기단식으로 보기는 어렵다. 매장주체부는 뚜렷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제일 상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평면은 북서-남동 장축의 타원형이며, 규모는 길이, 너비, 높이가 약 30×24-25×4-4.5m 정도이다. 유물은 돌무지 사이에서 회청색경질의 타날문항아리와 함께 쇠도끼(鐵斧), 쇠낫(鐵鎌), 쇠투겁창(鐵矛) 등의 철기 일괄과 소동종방울(小銅鐸)이 출토되었다.

도화리 것과 동일한 구조의 무덤은 제천 양평리, 양평 문호리, 춘천 중도 등의 한강 상류 지역과 연천 삼곶리·선곡리 등의 임진강 유역에서 지금까지 약 15기가 확인되고 있다. 이들은 지역적 분포 간격이 넓고, 1-2기 정도씩만 있어 분포 밀도가 매우 낮으며 단독장 보다는 주로 복수의 매장주체부를 가지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돌무지무덤을 고구려의 무기단식 돌무지무덤(積石塚)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한강유역에 정착한 백제 건국세력의 무덤으로 이해하며, 이를 근거로 백제 초기의 영역이 이들 지역에 미쳤다고 해석하여 왔다. 이에 대해 입지와 출토유물 등이 고구려의 돌무지무덤과는 차이가 많아 고구려 것과 구분해 즙석식적석묘(葺石式積石墓)로 부르고, 종족적으로 예계(濊系)의 지역 수장급 무덤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그 축조시기는 3세기 초-중엽 무렵으로서, 한강하류지역의 백제가 3세기 중엽 무렵 국가단계로 성장하면서 이들 지역을 빠르게 장악한 결과 소멸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도 기원을 전후한 무렵까지 여러덧널식(多槨式)의 무기단 돌무지무덤이 유행하므로 도화리등의 돌무지무덤이 고구려적 요소를 갖고 있음을 전적으로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이들간에는 시기 차이가 있다. 한편 유물, 특히 토기상에서 동시기의 한강하류지역과도 일정한 차이가 있고 본격적인 한성백제토기의 영향은 원주 법천리와 같이 4세기 중엽 이후에 보이므로, 이러한 돌무지무덤 집단을 백제에 정치적으로 완전히 통합된 것으로 상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百濟 國家의 形成 硏究(朴淳發, 서울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8년)
  • 初期百濟成長過程에 대한 一考察(權五榮, 韓國史論 15輯,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1986년)
  • 堤原 桃花里地區 遺蹟發掘調査 報告(崔夢龍 外, 忠州댐 水沒地區 文化遺蹟發掘調査綜合報告書-考古·古墳分野(Ⅰ), 忠北大學校博物館, 198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