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지권

매지권

[ 買地券 ]

무덤에 부장된 매지권은 죽은 사람이 묻힐 땅을 매매한 증서로서 묻은 것으로, 중국에서는 이를 묘권(墓券)이라 통칭하지만 지권(地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중국의 후한대(後漢代)부터 비롯된 것으로 송대(宋代)의 것과 함께 발견된 수가 가장 많으며, 중국인의 토지에 대한 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회경제사적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매지권 본문 이미지 1

한국에서는 무령왕릉에서 왕 및 왕비의 지석(誌石)과 함께 유일하게 출토되어, 백제의 토지제도 등을 이해하는데 거의 유일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것의 출토 상황을 보면 널길의 입구에 있던 2개의 장방형 판석 중 널길 입구에서 볼 때 오른쪽에 왕의 지석이 놓여 있었고, 왼쪽에 왕비의 지석이 있었다. 이 중 왕비 지석의 뒷면에 왕의 매지권이 새겨져 있는데, 왕과 왕비 지석의 가운데 뚫린 구멍의 위치가 반대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왕의 매지권으로 사용하였던 것을 왕비를 추가장할 때 그 뒷면을 이용하여 왕비의 지석을 새긴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 왕의 지석 내용이 소략하므로 매지권이 주이고 지석은 그 서문격으로서 이들 전체를 매지권으로 보기도 하지만, 지석은 매지권의 전문이 아닌 것으로서 전체를 지석으로 보거나 또는 지석과 매지권을 각기 별도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 등이 있다. 그러나 지석은 묻힌 사람의 신원을 밝히고 그 업적 등을 기리기 위한 것이므로 지석과 매지권을 각기 별도로 보는 견해가 보편적이다.

무녕왕릉 매지권(왕비지석 뒷면)

무녕왕릉 매지권(왕비지석 뒷면)

무녕왕미 지석 앞면

무녕왕미 지석 앞면

매지권은 상하로 4.3-4.8㎝ 간격의 음각종선을 9개 그은 다음 2번째 행부터 6칸을 새겼으며, 총 글자 수는 48자이다. 그 해석을 보면 첫째 행의 ‘전일만문(錢一萬文)’은 토지를 매매한 액수를 적은 것이며 ‘우일건(右一件)’은 토지 매입 문서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매지권 위에 묶여 놓여 있던 중국 철제 오수전(五銖錢) 90여 개는 그 매입대금을 상징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상서로운 수로 9자를 중복하여 쓰거나 8백만 전(錢)과 같이 상징적인 액수를 적는 경우와 9천 3백전(錢)과 같이 현실적인 토지 매매가격을 적는 경우가 있는데, 이와 비교하여 일만문도 현실적인 토지가격을 기준으로 산정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둘째와 셋째 행의 ‘을사년-백제사마왕(乙巳年-百濟斯麻王)’은 525년 8월 12일 왕을 능에 모신 날과 문서의 매매 주체를 표기한 것으로서, 왕의 영혼이 남아 있다는 당시인의 사후세계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전건전(前件錢)’은 앞의 전일만문(錢一萬文)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전건전-상하중관이천석 매갑지위묘(以前件錢-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는 “앞에 든 돈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 연봉 이천석 이상의 상하 중관에게서 신지를 사서 묘를 만들었다”고 해석된다.

이들 토지신의 명칭은 도교의 지신명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토왕은 지하세계를 주관하는 신이며 나머지는 그 권속으로 이해된다. 즉 죽은 무녕왕이 구체적으로는 토왕에게서 묘지를 매입한 것이 되며, 중국에서도 토지신과 그 권속이 묘제 매매의 주체로 많이 기록되고 있다. 신지(申地)는 정확히는 서와 남쪽의 간방위(間方位)로부터 서쪽 15˚ 방향인데, 그 기준은 왕궁으로부터 서쪽으로 볼 수 있다.

‘고립권위명(故立卷爲明)’은 “문서를 만들어 증명으로 삼는다”는 것이며, 마지막의 ‘부종율령(不從律令)’은 말 그대로 “율령을 따르지 않는다”로 해석된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여천제율령(如天帝律令)’ 등과 같이 모두 율령을 따른다고 되어 있어 무녕왕 것과는 전혀 달라 그 율령의 의미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다. 율령은 고대국가에서 관습법을 법제화한 것이거나 또는 도교적인 천제(天帝)의 율령 개념이 있는데, 중국과는 다른 표현 방법으로 보아 ‘부종율령’은 백제 현실세계에서 토지 매매를 금하고 있던 율령을 무령왕이 사후세계에서 어기고 토지를 매입하였므로 이를 명시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무령왕의 매지권은 이처럼 중국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내용과 형식에서 중국 것과 많이 다른 점이 있다. 첫째 중국의 묘권에서는 매입한 날을 맨 앞에 기록하고 표제에 해당하는 문구가 일반적으로 없는 데 비해, 무령왕 매지권에서는 매매금액과 매매건명을 표제격으로 맨 앞에 내세우고 있다. 둘째로 중국에서는 매매된 토지의 위치와 면적, 경계 등을 구체적으로 적는 데 반해 매지권에서는 단순히 간지만으로 방향을 표기하였으며, 셋째로 중국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율령문구를 사용한 점 등이 백제의 현실에 맞게 변용된 모습으로 파악된다. 한편 간지에 의한 방향표기는 백제의 토지제도와 관련하여 매지권이 작성된 6세기 초반 무렵까지 아직 국가적인 양전(量田)이 실시되지 못했던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참고문헌

  • 武寧王 買地券을 통하여 본 熊津時代 百濟의 租稅制度(李喜寬, 國史館論叢 제82집, 國史編纂委員會, 1998년)
  • 武寧王 買地券을 통하여 본 百濟의 土地賣買問題(李喜寬, 百濟硏究 제27집, 忠南大學校 百濟硏究所, 1997년)
  • 誌石의 形態와 內容(成周鐸·鄭求福, 百濟武寧王陵, 公州大學校 百濟文化硏究所, 1991년)
  • 百濟의 稅制(梁起錫, 百濟硏究 18, 忠南大學校百濟硏究所, 1988년)
  • 中國歷代墓券略考(池田溫, 東洋文化硏究所紀要 第86冊, 1981년)
  • 武寧王陵(文化財管理局, 197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