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

묘지

[ 墓誌 , 誌石 ]

무녕왕 묘지. 가로:41.5cm, 세로:35cm, 두께:5cm

무녕왕 묘지. 가로:41.5cm, 세로:35cm, 두께:5cm

피장자의 성명, 직함, 가족세계, 생시행적 등을 써서 무덤 가운데에 남기는 기록물이다. 무덤방(墓室)에 직접 묵서(墨書) 혹은 주서(朱書)하거나 무덤방 벽면에 새기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돌 위에 새기는 것이나 틀을 이용하여 벽돌, 혹은 주철을 소재로 작성된 것에서 청자나 백자에 쓰여진 것으로 남겨진 것 등이 시대와 피장자의 신분, 장법 등에 따라서 다양하다.

원래 묘지는 중국에서 동한(東漢) 시기에 기원하여 위진시대 이후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풍습이 한국에도 유입된 것이라 하겠다. 河南省 洛陽에서 출토된 한(漢) 연평원년(延平元年: A.D.106) 고무중(賈武仲)의 처 마강(馬姜)의 묘지는 기재 내용이 묘지에 가까운 것이긴 하지만 완성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 그런데 江蘇省 丕縣에서 발견된 무우(繆宇)의 묘에는 뒷방(後室) 입구 상단에 피장자의 성명, 사망, 장례일자, 관직, 송사(頌辭) 등의 내용이 새겨 있다.

한국에서 묘지라 하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묘에서 주로 보이는 명문이 새겨진 방형의 소석판(小石版)이나 도판(陶版) 등의 형태를 일컫는다. 하지만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묘지라고 하면 무덤의 벽면에 쓰여지거나 새겨진 명문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에는 무덤방 벽면에 묵서로 묘지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현재 3기의 고분이 그러한데 모두루총(牟頭婁塚), 동수묘(冬壽墓)로 알려진 안악(安岳) 3호분, 그리고 덕흥리(德興里) 고분이 그것이다.

협의의 개념에서 소판의 형식을 빌린 묘지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백제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나온 것이다. 벽돌무덤인 무녕왕릉의 널방(玄室) 입구에서 왼쪽에는 왕비의 지석이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왕의 것이 놓여 있는데 그 위에는 양나라 때 오수전이 한 꾸러미 놓여 있었다. 사실 무녕왕릉의 묘지석은 묘지라고 부르기보다는 중국의 장례 풍속을 따라 지신으로부터 땅을 사들인다는 뜻으로 만든 매지권(買地權)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한국에서 묘지가 흔하게 발견되기는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고려시대에는 오석(烏石), 혹은 점판암계의 장방형 석판를 물갈이해서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조선시대가 되면 오석이나 점판암과 함께 자기로 된 도판이 많이 쓰이게 되었다. 특히 흰색의 바탕에 청색으로 글씨를 쓴 청화백자계의 묘지가 많이 쓰였다.

고려시대의 묘지가 중국 묘지의 체제를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면, 조선시대의 묘지는 재료, 형태, 내용 등에서 고려시대의 것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소판형(小板形)의 기본 틀에서 벗어난 조선시대의 묘지는 묘비모양, 단지모양, 원통형, 표주형(標柱形) 등 다양하다. 또한 장례의식 중 묘지를 안치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면모가 엿보이기 때문에 묘지의 작성과 그것의 매납은 단순히 피장자의 이름이나 약력을 알린다는 것 이상의 관념이 있는 듯하다.

참고문헌

  • 朝鮮時代 墓誌의 種類와 形態에 관한 硏究(崔虎林, 古文化, 25, 1984년)
  • 韓國金石遺文(黃壽永, 一志社, 197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