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모양토기

팽이모양토기

송림석탄리유적출토팽이모양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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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호남리유적출토팽이모양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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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과 저부에 비해 몸체가 부풀려 있어 마치 오늘날의 팽이와 유사한 모양의 토기를 말한다. 구연부는 홑아가리와 겹아가리〔二重口緣〕가 있으며, 저부는 지름이 3∼4㎝ 정도에 불과하여 바로 세우기 어려울 정도이다. 겹아가리에는 짧은빗금무늬〔斜線文〕가 단위를 이루어 새겨져 있는데 한 방향으로 새겨진 것과 엇갈린 방향으로 새겨진 것이 있다. 홑아가리에 새겨진 빗금무늬의 경우 단위를 이루지 않고 구연 전체로 돌아가면서 새겨되기도 하고, 홑아가리와 겹아가리 모두 무늬가 없는 것도 있다. 바탕흙〔胎土〕에는 모래와 활석(滑石)이 섞여 있으며, 표면은 일부 마연흔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물손질로 마무리되었다.

독모양토기〔甕形土器〕가 가장 대표적이지만, 변형팽이모양토기로도 불렸던 항아리모양토기〔壺形土器〕 역시 목이 달린 것을 제외하고는 구연부와 저부의 특징이 전형적인 팽이모양토기와 꼭 같다. 크기는 독모양토기의 경우 높이 15∼20㎝에서부터 30㎝가 넘는 것까지 다양하고, 항아리모양토기는 높이 40∼50㎝ 이상의 것이 많다. 두 기형 모두 다른 지역의 토기에 비해 대형이어서 저장용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함께 작은항아리〔小壺〕도 출토되어 세 기형이 함께 세트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분포권은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황해남·북도와 평안남도로 한정되어 뚜렷한 지역색을 띤다. 인천 삼거리 고인돌 인근지역에서도 한 점이 출토되어 팽이모양토기의 남한계(南限界)를 보여주며, 북한계(北限界)는 청천강유역까지 이른다. 최근에는 연천 삼거리 유적에서 팽이모양토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독모양 및 항아리모양토기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대부분 집자리에서 출토되었지만 봉산 어수구 돌널무덤〔石棺墓〕과 황주 심촌리 고인돌〔支石墓〕 등의 무덤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팽이모양토기와 함께 출토되는 석기로는 턱자귀〔有段石斧〕, 슴베식돌검〔有莖式石劍〕, 돌돈〔石貨〕 등이 특징적인데, 이 역시 다른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아 토기와 함께 대동강유역의 독특한 지역색을 보여주고 있다. 팽이모양토기가 남한의 가락동식토기(可樂洞式土器)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이 1970년대 이래 1990년대 중반까지 거의 정설처럼 인식되어 왔으나, 근래에는 오히려 압록강유역에서 출토되는 토기와의 관련성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팽이모양토기와 함께 출토되는 석기가 다른 지역으로 파급되지 않으며, 가락동식토기와 함께 출토되는 석기 역시 대동강유역보다는 압록강유역과의 관련성이 많은 점에서도 팽이모양토기가 남한의 중부 이남지역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대동강유역의 팽이모양토기 문화권의 교류는 압록강유역∼리야오도옹(遼東)지역과는 일부 인정되나 그 외 다른 지역과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팽이모양토기가 출토되는 집자리는 시기에 관계없이 평면 장방형이 대부분이다. 화덕자리〔爐址〕는 집자리 중앙부와 한쪽에 치우쳐서 각각 2기가 설치된 경우가 많고, 구덩식〔竪穴式〕과 돌두름식〔圍石式〕 모두 확인된다. 집자리 바닥에 2∼3열의 기둥구멍〔柱穴〕 혹은 주춧돌시설〔礎盤施設〕이 확인되기도 한다.

이 토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재지요소와 외부요소의 결합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즉 금탄리 제2문화층과 호남리(남경) 유적 신석기시대 후기문화층에 팽이모양토기와 유사한 기형의 토기가 있는데, 여기에 압록강하류역∼리야오도옹(遼東)지역에서 유행했던 겹아가리와 결합되면서 청동기시대의 팽이모양토기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팽이모양토기의 편년은 대략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된다. 전기에는 겹아가리가 많고 문양도 엇갈린 방향으로 단위를 이루는 빗금무늬가 연속적으로 새겨진 톱니무늬〔鋸齒文〕가 유행했다. 중기에는 톱니무늬가 소멸하고 빗금무늬도 3개가 한 단위를 이루어 같은 방향으로 새겨졌다. 후기에는 독모양과 항아리모양토기 모두 겹아가리 부위에 문양이 없는 것이 많으며, 있어도 앞 시기처럼 단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구연부를 돌아가면서 연속적으로 새겨진 것이 나타난다. 그리고 항아리모양토기의 경우 홑아가리가 두드러지면서 구연부 아래에 한 줄의 침선(沈線)을 돌리기도 하는 등 팽이모양토기의 마지막 시기에는 전·중기의 전형적인 모습에서 많이 변화되었다.

절대연대는 대략 상한을 기원전 15∼10세기, 하한을 기원전 5∼4세기로 볼 수 있다. 유적의 편년에 대해서는 세부적으로 다른 의견이 있지만, 금탄리 제3문화층·신흥동·심촌리 유적이 이른 시기의 유적이며, 립석리·원암리·쉴바위 유적이 늦은 시기에 해당한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석탄리·표대·남양리 유적에는 여러 기의 집자리가 서로 중복되어 있어 3∼4시기로 구분되기도 하여 한 곳에서 오랜 기간동안 팽이모양토기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배진성)

참고문헌

  • 朝鮮コマ形土器の再檢討(藤口健二, 森貞次郞博士古稀記念古文化論集, 1982년)
  • 각형토기고(한영희, 한국고고학보 14·15, 한국고고학회, 1983년)

동의어

각형토기(角形土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