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동식토기

가락동식토기

[ 可樂洞式土器 ]

가락동식토기(1, 2 : 둔산, 3~5 : 용산동, 6 : 영등동)

가락동식토기(1, 2 : 둔산, 3~5 : 용산동, 6 : 영등동)

1963년 발굴조사된 서울 가락동 유적토기를 표지(標識)로 한다. 청동기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 형식 가운데 하나로, 겹아가리〔二重口緣〕에 짧은빗금무늬〔短斜線文〕를 새긴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토기는 편평한 안정된 바닥의 깊은바리모양〔深鉢形〕, 항아리모양〔壺形〕, 또는 사발모양〔燔形〕의 토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깊은바리모양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일부 유적에서는 굽달린접시모양토기〔豆形土器〕가 공반된다.

가락동식토기(可樂洞式土器)는 겹아가리에 짧은빗금무늬가 새겨진 것을 중심으로 하며,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골아가리무늬〔口脣刻目文〕, 겹아가리+톱니무늬〔鋸齒文〕, 겹아가리+골아가리무늬, 겹아가리+톱니무늬+골아가리무늬, 겹아가리, 짧은빗금무늬, 짧은빗금무늬+골아가리무늬토기 등을 포함한다.

짧은빗금무늬는 주로 구연부 하단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연속적으로 새겨진 것이 특징적이지만, 일부는 톱니무늬인 경우도 있다. 겹아가리에 짧은빗금무늬가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는 대동강유역의 팽이모양토기〔角形土器 또는 新興洞式土器〕와 유사하다. 그러나 팽이모양토기의 저부 지름이 3∼5㎝ 정도로 좁아 안정적이지 않은 점이나, 겹아가리 부위에 새겨진 짧은빗금무늬가 단속적(斷續的)인 점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가락동식토기와 공반되는 석기 가운데 간돌검〔磨製石劍〕은 피홈〔血溝〕이 있거나 홈자루식〔二段柄式〕의 형태가 많으며, 돌화살촉〔石鏃〕은 삼각만입돌화살촉〔三角灣入鏃〕이나 이단슴베있는돌화살촉〔二段莖式石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반달돌칼〔半月形石刀〕은 배모양〔舟形〕이 주류이고, 물고기모양〔魚形〕이 일부 확인되며, 양날도끼〔兩刃石斧〕와 대팻날도끼〔扁平偏刃石斧〕도 공반된다.

청주 내곡동 집자리 출토 가락동식토기

청주 내곡동 집자리 출토 가락동식토기

가락동식토기는 장방형 또는 세장방형 평면에 돌두름식〔圍石式〕 화덕자리〔爐址〕나 주춧돌〔礎石〕이 설치되어 있는 둔산식집자리〔屯山式住居址〕에서 주로 출토된다. 둔산식집자리·가락동식토기·간석기〔磨製石器〕의 조합은 청동기시대 전기의 ‘가락동유형(可樂洞類型)’으로 분류되는데, 대전, 청주를 중심으로 하는 금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지역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대전 둔산동·용산동·궁동·노은동·신대동 유적, 청주 용정동·내곡동 유적, 금산 수당리 유적, 익산 영등동 유적 등이 있다. 한편, 가락동식토기는 금강유역 이외의 지역에서는 역삼동식토기(驛三洞式土器) 또는 흔암리식토기(欣岩里式土器) 등과 같이 출토되는 예가 다수 확인된다.

가락동유형의 존속시기와 관련한 방사성탄소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13∼9세기의 범위에 들어가는 것으로 측정되었다. 빠른 시기의 가락동식토기는 겹아가리의 형태가 뚜렷하면서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토기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시기가 늦을수록 겹아가리의 형태가 약해지면서 짧은빗금무늬나 골아가리무늬가 증가한다.

가락동식토기 또는 가락동유형의 계보와 관련하여 기존에는 팽이모양토기 중심권인 대동강유역과 연결시키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토기의 형태(편평한 바닥의 깊은바리모양) 및 무늬 특징(겹아가리·연속으로 새겨진 짧은빗금무늬), 집자리 구조(돌두름식 화덕자리, 주춧돌), 석기의 유사성 등에서 압록강·청천강유역을 기원지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다. 생계경제와 직결되는 물질문화가 남한지방의 가락동유형과 거의 동일한 점에서 압록강, 청천강유역으로부터 주민이 이주(移住)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형원)

참고문헌

  • 광주 가락리 주거지 발굴 보고(김정학, 고문화 제2집, 한국대학박물관협회, 1963년)
  • 남한지방 무문토기문화의 전개와 공열토기문화의 위치(이청규, 한국상고사학보 제1호, 한국상고사학회, 1988년)
  • 가락동유형 신고찰(이형원, 호서고고학 제4·5합집, 호서고고학회, 2001년)

참조어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토기, 이중구연단사선문토기(二重口緣短斜線文土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