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늘쇠

미늘쇠

[ 有刺利器 ]

미늘쇠(左:옥전 M6호분, 右:예안리 150호분)

미늘쇠(左:옥전 M6호분, 右:예안리 150호분)

미늘쇠는 유자이기(有刺利器)로 불리는 것으로 자루에 끼워 쓸 수 있도록 공부(銎部)가 만들어져 있는 판상(板狀)의 철기로, 원삼국시대 말기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신라·가야의 고분에서 자주 출토되는 철기의 일종이다. 가시가 돋친 인기(刃器)라는 의미로 미늘쇠(有刺利器)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지만 날이 서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기의 일종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으나 첫째, 날이 없다는 점, 둘째, 무기와는 같은 위치에서 함께 출토되지 않으며, 셋째, 대부분의 형태가 무기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 등에서 특수한 용도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지금까지 신라·가야지역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자이기는 쇠낫의 형태를 취한 극소수의 예를 제외하면 모두 판상쇠도끼(板狀鐵斧)나 덩이쇠(鐵鋌)와 같은 철소재류(鐵素材類)를 간단히 오리고 구부려 만든 것이다. 원삼국시대 말기와 삼국 초기 즉 3세기 후반부터 4세기대까지는 주로 판상철기(板狀鐵器) 혹은 판상쇠도끼(板狀鐵斧)를 재단하여 만들었으며 덩이쇠의 형식이 갖추어져 유행하게 되는 4세기 말이나 5세기 초가 되면 모두 덩이쇠를 재료로 사용한다.

시기적으로 변화해 가는 양상을 대강 살펴보면 최초의 미늘쇠는 3세기 말 혹은 4세기 초 무렵, 경주와 김해 등의 동남해안지대에서 발생한 듯하다. 울산 중산리 고분군 등과 같은 경주 주변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형식이 나오는데 최초의 형식을 보면 월형부(鉞形斧)의 형태에 가깝다. 즉 판상쇠도끼(板狀鐵斧)의 인부(刃部)쪽은 그대로 두고 장착부(裝着部)를 폈다가 오므려서 공부(銎部)를 만들고 공부 가까이, 즉 몸통의 기부(基部) 양쪽으로 가시를 오려서 고사리 모양으로 말아 놓았다. 이와 같은 초기형식은 주로 4세기 초 까지만 확인되는데 주로 나무덧널 두상부(頭上部)의 유물부장공간(遺物副葬空間)에 부장된 토기 위에 얹혀져서 1점씩만 출토된다.

4세기대가 되면 미늘쇠 자체가 세장(細長)해지고 몸통의 기부에만 있던 가시가 몸통 중간쯤에도 1쌍 더 생겨나기도 한다. 끝이 말려서 고사리모양이던 것이 점차 진정한 가시모양으로 바뀐다. 5세기대에 들어서면 합천이나 함안과 같은 지역에서도 미늘쇠가 제작되어 각지에 따라 뚜렷한 지역양식으로 발전함을 엿볼 수 있으며,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5세기대가 되면 덩이쇠를 두드려 펼치거나 투조하여 제작하게 된다. 5세기대가 되면 출토 위치도 정형화되는데 가령 4세기대에는 미늘쇠가 피장자의 머리 쪽에도 놓여지고 발치 쪽에도 부장되는 불규칙성을 보여주지만, 5세기가 되면 머리쪽 가까이, 피장자의 측부에 놓여진다. 긴 자루에 끼워진 상태로 추정해 보면 피장자가 자루를 쥐고 있는 상태로 복원된다.

각 지역에 따라 미늘쇠의 형태는 다양하게 전개된다. 5세기경 경주를 중심으로 경주(慶州), 부산(釜山), 대구(大邱), 창녕(昌寧) 등 낙동강 이동(以東)의 제 지역은 거의 비슷한 형식의 미늘쇠가 제작된다. 긴 덩이쇠를 재단하여 좌우 2쌍에서 4쌍 이상까지 가시를 만들며, 짧게 형식화된 공부와 호형(弧形) 혹은 착두형(鑿頭形)의 선단부를 가진 형식이 발달한다. 이에 비해 낙동강 서안지역은 방형(方形)으로 투조된 형식이나 원공이 뚫린 형식이 유행한다. 5세기대에 낙동강 서안에서 미늘쇠가 많이 출토되는 지역은 함안과 합천이다.

함안에서는 덩이쇠를 보다 얇은 장방형판으로 만들고 몸통에 2열 혹은 3열로 작은 원공(圓孔)을 뚫었고 짧게 접은 공부를 지녔다. 특이한 점은 좌우 여러 쌍의 새모양 소형철판을 나란히 부착한 것인데 합천지역의 형식과 공통된 요소이다. 합천지역의 5세기와 6세기대 분묘에서도 여러 점의 미늘쇠가 출토되었는데 옥전(玉田) 고분군에서 주로 5세기대 자료가 많이 나왔고 합천 저포리(苧浦里) E지구 유적에서 최말기의 형식들이 출토되었다. 합천지역에서도 기본적인 제작기법은 함안과 동일 하지만 소형 원공(圓孔)열을 낸 것 외에 장방형 투창을 뚫은 예가 있고 새모양 철편(鐵片)만을 부착한 것이 아니라 짧은 가시를 돋치게 만든 것이 있다. 그리고 선단부의 모서리를 함안처럼 각지게 처리하지 않고 둥그스름하게 하거나 톱니바퀴모양으로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현재의 자료로 미늘쇠의 정확한 용도를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실용도구로서 사용되기보다는 일종의 의례용 철기로 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초기의 월형부(鉞形斧)의 형식으로 출발한 점도 그러하거니와 긴 자루가 끼워진 채 피장자의 측부에 들려진 채 부장되었다는 점에서도 의기적(儀器的)인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최초로 출현할 때부터 소형덧널무덤에는 부장되는 일이 없고 일정 규모 이상의 무덤에서만 출토된다. 하지만 최상위 묘에서는 오히려 출토되는 일이 적은 편이고 5세기대에도 중·상위의 무덤에서 자주 출토된다. 출토상황으로 보면 다소 위세적인 유물이라고도 하겠지만 최상위묘는 아니라는 점에서 이를 부장한 피장자의 위계는 중·상위 신분 정도로 파악될 수 있다.

참고문헌

  • 三韓·삼국시대 철기의 의기적 성격에 대한 일고찰(徐영男·李賢珠, 伽耶考古學論叢 2, 伽耶文化硏究所, 1997년)
  • 有刺利器에 대하여(李賢珠, 東萊福泉洞古墳群Ⅱ, 釜山大學校博物館 199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