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예군묘

부조예군묘

[ 平壤 夫租薉君墓 ]

지역 평양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에서 발굴 조사된 정백동 1호분으로, 1958년 11월 땅을 파다가 발견되어 중앙역사박물관에서 조사하였다. 세형동검(細形銅劍)을 비롯한 여러 유물들과 함께 ‘부조예군(夫租薉君)’ 명문이 새겨진 은제 도장이 출토되어, ‘부조예군묘’라 부른다.

발굴 당시 봉분은 삭평되어 없어진 상태이고, 무덤 내부도 거의 파괴되어 바닥에서 목관 1기를 올려놓을 정도의 범위로 각재가 1벌 깔려 있었을 뿐 덧널(木槨)과 널(木棺)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수직으로 파 내려간 장방형의 구덩이에 덧널을 만들고, 그 속에 다시 널을 넣은 단장의 덧널무덤(木槨墓) 형식으로 추정된다.

무덤은 동남쪽으로 약간 치우쳐 남북으로 길게 놓였는데, 머리는 남쪽을 향하였다. 북쪽에 위치한 부장공간의 서북모서리에 화분형토기와 입큰항아리(廣口短頸壺)가 놓였고 그 주위에 삿갓형동기, 멍에끝장식 등 거마구(車馬具)가 있었으며, 동북모서리에 쇠도끼, 쇠갑옷편(鐵札片) 등이 널려 있었다. 바닥 중앙의 왼쪽에는 세형동검과 부속구, 세형동모(細形銅矛), 쇠뇌(弩) 등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철단검, 쇠칼 등 강철제 무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바닥 한가운데에서 ‘부조예군’ 도장이 나왔다.

세형동검은 나무 칼집에 든 채로 발견되었으나 나무는 썩어 없어지고, 백동금구(白銅金具)만 남아 있었다. 이러한 칼집은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검신(檢身)은 전형적인 형식으로 등날은 검신 끝까지 내려왔다. 크기는 길이 39.6㎝, 날 너비 48㎝, 등대 두께 1.6㎝이다. 쇠단검은 완형(完形)과 부러진 것 각 1점이 나왔다. 이 중 완형은 길이 34㎝, 경부 길이 10㎝, 검신폭 4.5㎝이며, 형태상으로 비록 등대와 결입부는 없지만 전체적인 형태는 함께 출토된 세형동검과 유사하다. 부러진 1점은 세형동검과 유사한 검집 속에 들어 있었으며, 검코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쇠단검과 검집은 강서군 태성리 8호분에서도 출토되었다. 동촉은 두나래 6점, 세모활촉 9점이 출토되었다. 철장검은 쌍날 2자루, 외날 1자루가 나왔다.

마면(馬面)은 마름모꼴로 별다른 문양 없이 은장식만 하였고, 재갈은 철제 두쪽 재갈이며, 재갈멈추개는 철봉을 ‘S’자로 휘어 만든 프로펠라형이다. 권총형동기, 삿갓형동기 등은 중원에서 확인되지 않는 고조선 특유의 거마구들이다. 이러한 무기와 거마구는 아직 중원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고, 재래 고조선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도장은 은제이며, 1변 2.2㎝의 방형에, 두께 0.5㎝이다. 도장의 상부에는 짐승 모양의 손잡이가 붙어 있고, 도장면에는 4등분된 공간에 ‘부조예군(夫租薉君)’이 깊고 굵게 새겨져 있다. 글씨는 소전체이다.

부조예군은 부조현(夫租縣) 지역의 유력한 세력으로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면서 기존의 세력을 인정받아 군현(郡縣)으로부터 읍군(邑君)으로 임명되어 부조예군 인수를 받게 되었고, 한군현이 그와 토착지와의 관계를 끊으려는 의도로 평양에 옮겨 살게 하다가 죽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부조예군묘의 묘제와 유물조합에서 천주리 유적, 금석리 유적, 태성리 유적, 운성리 유적 등과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B.C. 1세기 중후엽으로 편년되는 서북한지역 덧널무덤과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부조예군묘는 세형동검문화의 전통을 유지한 나무덧널무덤이라는 점에서, B.C. 1세기대 낙랑군의 치하에 있던 고조선 후기 토착세력의 모습을 보여주는 무덤으로 주목된다.

참고문헌

  • 부조예군에 대한 고찰(김기흥, 한국사론12, 1985년)
  • 부조예군무덤 발굴보고(리순진, 고고학자료집4, 1974년)
  • 부조예군무덤에 대하여(리순진, 문화유산1964-4, 1964년)
  • 부조예군도장에 대하여(백련행, 문화유산1962-2, 196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