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성리 유적

운성리 유적

[ 殷栗 雲城里 遺蹟 ]

지역 은율

황해남도 은율군 서부면 운성리에 위치한 낙랑군 시기의 고분군으로, 은율읍에서 4㎞ 떨어진 운성리 가말뫼 마을의 남쪽에 동서로 가로지르는 나지막한 야산에 백 수십 기의 고분이 군집해 있다.

모두 7차례의 정식 발굴을 통해 23기가 조사되었다. 1954년 4월 세형동검(細形銅劍), 동꺾창(銅戈), 거마구(車馬具) 등이 출토된 움무덤(土壙墓) 1기를 발굴한 이래(1차), 1962년 4월에는 토성과 움무덤 4기, 귀틀무덤 3기, 독널무덤(甕棺墓) 1기(2차), 1963년 5월 독널무덤 5기, 기와널무덤(瓦棺墓) 2기(3차), 1963년 7월 움무덤 1기(4차), 1966년 11월 움무덤 3기(5차), 1975년 10월 움무덤 1기, 귀틀무덤 1기(6차), 1978년 11월 귀틀무덤 1기(7차)를 발굴하였다. 1-4차 발굴은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5-7차 발굴은 해주역사박물관에서 실시하였다. 1916년 일본인이 벽돌무덤(塼築墳) 2기를 조사한 적도 있다.

고분군은 무덤의 유형별로 군집을 이루고 있다. 움무덤과 덧널무덤(木槨墓)은 동쪽 봉우리를 중심으로, 귀틀무덤은 서쪽 봉우리와 북쪽 경사면 윗부분에, 벽돌무덤은 두 봉우리 사이의 북쪽 경사면 기슭에 분포한다. 또한 화분형토기를 사용한 독널무덤은 움무덤과 널무덤 사이에, 회색타날문토기를 이용한 독널무덤은 귀틀무덤 사이에, 기와널무덤은 벽돌무덤 사이에 주로 분포한다.

움무덤은 무덤구덩이(墓壙)를 수직으로 파고 나무널(木棺)을 넣은 다음 봉분을 쌓았고, 덧널무덤은 장방형(長方形)의 무덤구덩이 속에 판재나 각재로 장방형의 나무덧널을 만들고 내부에 나무널과 부장품을 넣었는데, 2·3·4·9호분 등은 단장(單葬)이고, 5호분 등은 이혈합장(異穴合葬)이다. 이른 시기에는 세형동검, 동꺾창 등이 부장되다가 철제 무기와 공구의 부장으로 대체되며 다수의 철제 거마구들도 부장된다. 시신의 머리쪽에는 화분형토기와 입큰항아리(廣口短頸壺) 1쌍을 부장한다. 단장분의 경우에는 합장을 미리 예상하고 무덤구덩이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하여 무덤구덩이의 단벽이나 장벽에 세장방형(細長方形)의 홈을 파서 흰 모래를 채운 점이 특징적이다. 무덤구덩이 위에 흑회색 진흙을 깐 뒤 봉분을 축조하는 점이 독널무덤에서도 공통적으로 확인되는데, 이는 방습의 효과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덧널무덤은 동혈합장(同穴合葬)인 귀틀무덤으로 다시 발전하는데, 역시 수직으로 굴착한 장방형의 무덤구덩이 속에 각재로 귀틀곽을 만든 다음 시신을 넣은 널과 부장품을 안치하게 된다. 6·7·8호 등이 대표적이다. 무덤의 장축이 남-북 방향인 경우에는 북쪽 부분에, 동-서 방향인 경우에는 동쪽 부분에 격벽을 설치하여 귀틀곽 내부를 부장칸과 분리한다. 평양 낙랑구역에서는 귀틀무덤 단계가 되면 유물의 부장이 질과 양에서 크게 나아지지만, 운성리 고분군에서는 오히려 빈약해지는 특징을 보인다. 이전과 달리 소량의 철제 무기나 공구가 부장되는 데 그치고, 널 내 소량의 구슬만 확인된다. 다만 토기의 조합상에서는 화분형토기와 입큰항아리의 조합에 회·백색 독(甕)이 추가된다. 이러한 양상은 강서군 태성리 고분군과 매우 유사하다.

세형동검과 동투겁창(銅矛)은 1954년 조사분에서, 세형동검과 검파두식(劍把頭飾)은 9호분에서 출토되었으며, 1954년 조사분에서는 말종방울(馬鐸)의 혀로 이용된 오수전(五銖錢)도 발견되었다. 철제무기와 공구는 특히 목곽묘에서 풍부하게 부장되었는데, 철장검(鐵長劍)과 쇠칼(鐵刀),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이 모두 존재하며, 쇠투겁창(鐵矛), 쇠도끼(鐵斧), 쇠낫(鐵鎌), 쇠끌(鐵鑿) 등도 확인된다. 거마구에는 거축두, 일산대꼭지, 재갈 등도 부장된다. 토기는 화분형토기와 입큰항아리를 기본으로 부장되다가, 귀틀무덤 단계가 되면 회·백색 독이 추가되는 양상을 보인다. 토기는 머리쪽에 별도로 설치된 공간에 부장되었다.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유구는 세형동검이 출토된 9호와 귀틀무덤인 7호 정도이다. 단인장의 덧널무덤인 9호에서 출토된 세형동검은 태성리 10호의 출토품과 형태 및 크기에서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B.C. 1세기 전엽으로 볼 수 있다. 7호의 경우 B.C. 14년 절대연대를 지닌 같은 무덤구조의 정백동 2호분과 비교하여 기원전후 시기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대체적인 추이는 평양 낙랑구역의 고분군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으며, 정식 발굴 조사 예는 없으나 고분군의 하한은 벽돌무덤 단계로 내려온다.

고분군에서 북쪽으로 약 4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동서로 길게 놓인 토성 1기가 확인되었는데, 규모는 동~서 100m, 남~북 60m 정도이며, 성벽은 현재 1~3m 정도 잔존한 상태이다. 성 내부에서 집자리 1기 등을 발굴하였으며 성벽 바깥에서는 해자(垓字)도 확인되었는데, 여기서는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화분형토기와 항아리(壺)가 출토되었다. 운성리 토성과 고분군의 조합은 평양의 낙랑구역에서 토성리 토성과 그 주변의 고분군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것과 비교되는 것으로서, 당시 낙랑군 예하의 현치(縣治)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은률군 운성리 나무곽무덤과 귀틀무덤(리규태, 고고학자료집 6, 1983년)
  • 운성리유적 발굴보고(리순진, 고고학자료집 4, 1974년)
  • 은율군 운성리 움무덤 발굴 중간보고(방성홍, 고고민속 1967-1, 1967년)
  • 황해남도 은률군 운성리 토광묘 발굴보고(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고고학자료집 1, 1957년)
  • 大正5年度 古蹟調査報告(黑板勝美 外, 19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