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유적

제사유적

[ 祭祀遺蹟 ]

제사는 신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차려놓고 의식을 베풀거나 또는 그 의식을 행하던 장소이다. 선사·고대사회에서의 인간의 생활은 자연에 의존하는 바가 매우 컸고, 그러한 생활 속에서 인간은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거나 그것을 두려워하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자연이나 사물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신에 대한 인식도 더욱 확고해지고, 그러한 인식이 집단적인 행위로 나타난 것이 곧 제사라 할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 이러한 제사를 인지하기 위해서는 관련 유구나 유물과 같은 구체적인 증거를 필요로 한다. 실제로 제사는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러한 증거를 남긴 예는 많지 않다. 따라서 여기에서 제사유적 또는 유구라 하는 것은 제사와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거나 유구 자체가 그러한 흔적을 내포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것으로 한정하는 수밖에 없으며, 제사만을 위한 별도의 시설이 아니라 하더라도 제사 또는 의례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는 함께 언급하기로 한다.

한반도에 있어서 구석기시대의 제사와 관련된 유구나 그러한 흔적의 적극적인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 수렵이나 채집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이동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석기시대인들에게서 제사유적을 찾는 것 자체가 용이하지 않다. 조각품이나 예술품이라 칭하는 것들은 이러한 제사의례와 일정한 관련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것만을 가지고 제사를 논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다.

신석기시대의 제사관련 유적으로는 진주 상촌리 유적과 영종도 는들 유적을 들 수가 있다. 상촌리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집자리 한쪽에 대형의 냇돌(川石)과 깬돌(割石)을 쌓아서 만든 5×4.5m 크기의 돌무지(積石)유구가 조사되었다. 이 돌무지유구의 주위에는 도랑이 돌려져 있으며, 주변에서 빗살무늬토기편과 돌도끼, 탄화된 도토리, 목탄 등이 출토되었다. 돌무지유구 자체가 제사유구로 판단되며, 주변의 도랑은 제사유구를 둘러싸는 구획시설일 가능성이 높다. 영종도 는들 유적 B지구에서 확인된 원형 돌무지유구 역시 주위 12.7×12.4m 범위에 걸쳐 방형(方形)의 도랑이 돌려져 있고, 내부의 중앙에서 북쪽으로 치우친 곳에 불을 피운 흔적이 있는 직경 2m 가량의 돌무지유구가 위치하고 있다.

쌓여진 깬돌 사이에서는 다량의 빗살무늬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이 유구들은 집자리와 같은 생활유적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랑으로써 구획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호 공통성을 가진다. 이 도랑은 신성한 지역을 주변과 구분하는 구획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신석기시대부터 이미 공간을 구획하는 도랑이 등장하며, 제사를 위한 특별한 시설물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춘천 교동이나 울진 후포리, 통영 연대도 등 신석기시대의 매장유적도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매장과 관련된 장송의례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매장 이외에 따로 제사와 관련된 유구는 드러나지 않았다.

수렵·채집을 위주로 하던 사회에서 식량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농경사회로 접어들게 되면서 세계관의 변화, 자연이나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 등의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게 되고 무덤을 만드는 것이 일반화되면서 공간에 대한 개념이 보다 구체화되었다. 또한 농사를 짓고 살게 되면서 식물의 성장이나 소멸의 주기, 계절의 변화, 다산과 풍요 등에 대한 다양한 인식도 확립되었다. 따라서 청동기시대부터 제사의 형태나 종류가 매우 다양해지고 구체화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제사로는 농경의례, 장송의례, 생활의례, 그리고 특수한 성격의 의례로 나눌 수가 있다.

농경의례는 농사에서의 풍요를 기원하는 것으로, 생활근거지 주변이나 경작지에서 의례가 이루어졌다. 진주 대평리 어은 1지구의 밭과 집자리 주변 곳곳에서는 농경의례와 관련되는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밭의 내부에서 토기와 각종의 석기, 이형의 토제품이나 석제품 등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밭의 곳곳에서는 이러한 유물들을 모아놓은 집석유구도 확인되었다. 동일한 형태의 집석유구가 집자리의 주변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농경의례가 밭뿐만 아니라 집자리 주변에서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생활의례는 넓은 의미에서는 농경의례도 포함되는 것이나, 농경의례 외에 일상적인 생활과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장소는 집자리의 내부나 주변, 화덕자리, 환호, 집자리 주변의 물가(水邊) 등 다양하다. 집자리의 벽을 파고 그 속에 유물을 포개어 두거나, 화덕자리의 사용 또는 폐기와 관련하여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여러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울산 검단리 유적이나 진주 대평리 유적, 합천 영창리 유적, 대구 동천동 유적 등 여러 유적에서 확인된 도랑유구나 구덩이유구 역시 생활과 관련된 의례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도랑이나 구덩이 속에는 폐기한 듯이 보이는 다양한 유물과 소토, 목탄 등이 출토되는데, 이들은 의례에 사용된 후에 폐기된 유물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합천 영창리 유적과 같이 구덩이 내에서 청동기가 출토되거나, 대구 동천동 유적에서 목검을 본뜬 석검이 출토되는 예는 특기할 만하다. 환호는 적의 방어나 공간의 구획 등을 목적으로 하는 시설로, 마을을 다른 공간과 구분하는 경계의 의미가 강한 유구이다. 이러한 경계시설로서의 환호 역시 제사나 의례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울산 검단리 유적, 창원 남산리 유적, 합천 영창리 유적, 진주 대평리 유적, 산청 사월리 유적, 부천 고강동 유적 등 환호가 조사된 대부분의 유적에서는 환호 내부에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들 유물은 도랑유구나 구덩이유구 내부의 출토품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폐기된 것이라기보다는 신앙적인 의미가 강하게 부여되어 있다. 석기나 토기를 고의로 깨거나, 소형의 토제품과 석제품의 이용, 붉은간토기의 다량 이용 등 일상적이지 않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부천 고강동 유적의 경우 정상부에 위치하는 돌무지유구 주위에 다중의 환호가 돌려져 있어 그러한 의미가 더욱 강하게 부각된다.

마을 주변의 물가 역시 제사의 장소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산청 묵곡리 유적과 같이 강변의 충적대지에 좁은 구를 파고 그 속에 의례와 관련된 많은 유물을 폐기한 것은 드문 예로, 제사 전용의 제장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비슷한 예는 대구 동천동 유적이나 창원 토월동 유적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특히 대구 동천동 유적에서는 제사와 관련된 제단이라 판단되는 유구도 동시에 확인되었다.

장송의례는 조상신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시신의 매장과 관련된 일련의 행위 외에 별도로 제사라 부를 만한 흔적이 고인돌을 비롯한 무덤의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매장과 거의 동시기에 행해지는 장송의례 외에 매장 이후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까지도 지속적으로 그러한 행위가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무덤은 그 자체가 제사라 해도 좋을 정도의 것이므로, 구체적인 예는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유물의 경우 시신과 함께 매장되는 부장품과 제사에 사용되었던 각종의 유물은 반드시 구분하여야 하겠다.

청동기시대의 특수한 제사로서는 암각화와 청동기 매납을 들 수 있다. 암각화는 대부분 인적이 드문 물가의 수직 암면에 새겨져 있는 것으로, 그 시기가 분명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 울산 반구대 유적의 사실적인 동물암각과 울산 천전리의 기하학적인 문양을 제외하고, 고령 양전동이나 안화리, 영일 칠포리, 영주 가흥동, 남원 대곡리, 경주 석장동 등 대부분의 유적에서는 모두 동일한 형태의 패형암각(貝形岩刻)이 새겨져 있다. 이 패형암각의 형태가 상징하는 바는 정확하게 파악되어 있지 않으나 신상, 인면, 신면 등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강가의 외딴 봉우리에 위치하는 이 암각화유적은 그 자체가 제장이었던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청동기 매납 역시 특수한 형태의 제사유구로, 무덤이나 집자리가 아닌 별도의 장소에 청동기만을 묻어둔 것이다. 청도 예전동, 산청 백운리, 마산 가포동, 대구 만촌동 등 여러 유적에서 동일한 형태가 확인되고 있으며, 모두 산의 급경사면에 무구를 매납한 점에서 공통되고 있다. 특히 마산 가포동 유적은 바닷가의 급경사면에 위치하는 바위 틈 사이에 동검동꺾창, 동투겁창 등의 청동기를 끼워 넣어둔 것으로, 정식으로 조사된 최초의 청동기 매납유적이다. 청동기의 매납은 그 위치나 유물구성 등 여러 점에서 검토되어야 할 사항이나, 대상유물이 청동기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일개인의 제사가 아니라 범 집단적 또는 집단의 최고 지배자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 사천 이금동 유적에서는 고인돌군과 집자리 사이에서 신전으로 판단되는 대규모의 고상건물지가 조사된 바도 있다.

원삼국시대의 제사유구로 대표적인 것이 고성 동외동 조개무지 정상부에서 확인되었다. 이 구릉 정상부의 평탄한 광장에는 구덩이가 여러 개 패여 있었고, 그 가운데 하나에서는 조문청동기(鳥文靑銅器)가 출토되었다. 이 청동기는 중앙에 큰 새 2마리를 새기고 그 주변에 작은 새 수십 마리와 함께 고사리문, 톱니문, 점문을 새겼다. 그리고 상부와 양 측면의 가장자리에는 많은 구멍이 있어 옷에 꿰매거나 수술 같은 것을 달 수 있게 하였다. 동일한 형태의 청동기가 영광 수동 토광묘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동외동 조개무지의 구릉 정상부가 제장으로 이용되고 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삼국시대의 제사유구 역시 생활유적, 분묘유적, 생산유적 등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으며, 물가나 해안, 산의 정상 등과 같은 곳에서 특수한 성격을 가졌을 것으로 판단되는 것들도 조사되었다.

생활유적과 관련된 제사유구로는 우물, 해자, 그리고 집자리 주변의 구덩이 등이 있다. 삼국시대의 생활유적 곳곳에서는 많은 우물이 조사되었는데, 그 속에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 유물들은 일견 우물에 빠뜨린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유물의 구성이나 상태 등으로 보아 우물과 관련된 제사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경주 월성 해자 내부에서 출토되는 다량의 유물이나 인골 역시 우연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청동기시대 환호에서의 제사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며, 특히 인골을 해자 내부에 폐기하는 행위 역시 제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한편, 대구 칠곡, 산청 옥산리, 대구 시지동, 경주 삼랑사 3길 등의 유적에서는 부정형의 구덩이가 다수 조사되었다. 한 지역에 중복해서 집중되는 경향이 강하며, 내부에서는 많은 양의 유물과 목탄 등이 출토되고 있다. 이 유구 자체가 제사유구인지, 혹은 제사에 사용되었던 유물들을 폐기한 곳인지는 검토의 여지가 있으나 일상적인 생활 시설이 아님은 분명한 것 같다.

삼국시대의 고분에서도 제사와 관련된 유구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매장 등 시신과 직접 관련이 있는 유구 외에, 봉토의 일부를 파고 그 속에 유물을 매납하거나 혹은 별도의 시설물을 축조하는 것이다. 이 유구들은 대부분 둘레돌(護石) 등 묘역의 범위 내이거나 둘레돌에 덧붙여서 돌을 돌리거나 바닥에 돌을 까는 등의 시설물이 있는 경우가 많다. 봉분 주위의 주구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토기나 철기와 같은 유물을 매납하거나, 말(전체 또는 일부)을 매납하기도 하며, 소토나 목탄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현지에서 음식을 조리하여 바치거나 함께 먹는 행위도 있었던 것 같다.

생산과 관련된 제사유구는 제철유적, 논, 가마터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진천 석장리 제철유적에서는 노(爐)의 내부나 주변에서 제철 공정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토기, 시루, 소형토기, 뼈 등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토기 가마가 대량으로 조사된 경주 손곡동 유적에서는 가마 주변의 부정형 수혈 내에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양자는 비슷한 성격을 가진 유구로, 철이나 토기의 생산과 관련된 제사가 가마나 그 주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농경과 관련된 제사유구는 부여 서나성과 부여 논티에서 확인되었다. 서나성에서는 논바닥을 파고 그 속에 토기편을 뚜껑으로 한 항아리가 묻혀 있었는데, 논의 조성과 관련된 지진구의 성격이 강하다. 논티 유적에서는 구상의 유구 내부에서 소형철기와 남근모양의 토기 손잡이, 각종의 곡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들은 모두 농경과 관련된 제사의 흔적으로 보여지는 것들이다.

이외에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산성과 해안 등 특수한 장소에서 제사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영암 월출산, 광주 이성산성, 대전 보문산성 등에서는 산의 정상이나 산성과 인접한 곳에서 토제나 철제의 말을 비롯하여 각종의 토기 및 자기편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월출산 천황봉은 『삼국사기 제사지』에 소사(小祀)터로 기록되어 있는데, 조사결과 문헌기록과 일치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이러한 제사는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계속해서 그 맥을 잇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부안 죽막동 유적은 변산반도의 가장 돌출된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멀리 위도를 바라보고 있다.

이곳은 고대로부터 해상 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물살이 매우 거센 곳으로, 제장으로서의 입지를 갖추었다고 할 만 하다. 삼국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제사유적으로,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되어 그 내용이 매우 자세하게 알려져 있다. 4~7세기대의 토기, 철기, 금공품, 석제품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 중에는 백제 이외의 가야나 일본, 중국의 유물까지 포함되어 있어 그 국제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현재까지도 수성당이라는 당집이 위치하고 있을 정도로 어민들에게 있어 큰 의미가 부여된 곳이다.

이상으로 제사유적과 유구를 시대별로 개관하여 살펴보았다. 제사나 의례는 대부분 말이나 행동과 같은 무형적인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제사를 살펴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 내용 또한 극히 단편적일 수 있다.

참고문헌

  • 靑銅器時代 儀禮에 관한 考古學的 硏究(이상길,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박사학위논문, 2000년)
  • 제사고고학의 연구성과와 과제(김두철, 고고학의 새로운 지향, 부산복천박물관, 2000. 10.)
  • 부천 고강동 선사유적 제4차 발굴조사보고서(배기동·강병학, 부천시·한양대학교박물관/문화인류학과, 2000년)
  • 영암 월출산 제사유적(목포대학교박물관, 1996년)
  • 영종도 는들 신석기유적-신공항고속도로건설지역발굴조사보고서-(임효재, 양성혁,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1999년)
  •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국립전주박물관, 199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