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봉리 유적

구봉리 유적

[ 扶餘 九鳳里 遺蹟 ]

지역 부여
출토유물 각종

출토유물 각종

1985년 3월에 구봉리 공동묘지에서 분묘를 만들 때에 발견된 초기철기시대청동기를 부장한 돌널무덤(石棺墓) 유적으로, 부여에서 서쪽으로 8㎞ 떨어진 국도 옆에 남으로 돌출한 표고 약 35m 정도의 언덕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주민이 합장을 위해 묘를 파는 과정에서 돌널무덤이 발견되었다. 무덤 앞에는 금강의 지류인 구룡천이 흐르고, 전면에는 너른 구룡평야가 펼쳐져 있다.

이와 같은 입지조건은 같은 충청도 지방에서 이보다 앞선 시기의 아산 남성리(南城里), 부여 연화리(蓮花里), 대전 괴정동(槐亭洞) 등의 세형동검관계 청동기 출토 돌덧널무덤(土壙石槨墓)과 매우 비슷하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현지를 조사했는데, 조사자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파헤쳐진 유구(遺構) 자리에 무덤이 만들어져 구조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주민 제보에 따르면 지상에는 무덤이라고 인정할 만한 흔적이 없었다고 하며, 풍화암반을 파서 만든 지하구조는 정확히 남-북 방향이다. 지표에서 0.5m 정도 아래에서 풍화암반층(風化巖盤層)이 시작되는데, 여기부터 다시 길이, 너비, 깊이가 1.8×1.0×0.5m 정도의 토광을 파서, 화강암의 깬돌(割石)로 석축(石築)을 쌓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출토한 점판암제의 판돌 2매는 돌널(石棺)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보이나, 돌덧널무덤(石槨墓)의 단벽을 구축한 벽석으로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 못한다. 분묘의 개석용 판돌이 보이지 않는 점을 보아, 목판으로 뚜껑을 한 것으로 추정되며, 적석시설(積石施設) 또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은 동검(銅劍) 11점, 동꺾창(銅戈) 2점, 동투겁창(銅矛) 1점, 동도끼(銅斧) 2점, 동경(銅鏡) 2점, 동끌(銅鑿) 1점, 동사(銅鉈) 1점, 간돌도끼(磨製石斧) 1점, 숫돌(砥石) 1점, 토기 2점 등 모두 24점이다. 동검 11점은 길이 23.5-33.9㎝의 범위에서 다양한 크기를 갖고 있다. 하나의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서는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많은데, 그 중 7점은 등날이 결입부 이하에는 나 있지 않는 윤무병의 Ⅰ식이고, 4점은 검신(劍身)의 기부(基部)까지 마연한 II식(尹武炳, 韓國靑銅器文化硏究, 藝耕産業社, 1991.)이다.

동꺾창 2점은 길이 26.7㎝, 25.5㎝로서 등대에 날이 형성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좌우의 피홈이 있는 것과 등날 없이 혈구(血溝)가 봉부(鋒部)에서 합치는 것이 있다. 동투겁창 1점은 길이 17.7㎝로, 마연부가 관부 이하 인부가 끝난 곳까지 발달하여 있다. 자루 끝에 돌대가 있고, 바로 옆에는 작은 타원형의 구멍이 있다.

동도끼 2점 중 1점은 허리가 다소 축약되고 날쪽이 살짝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길이 12㎝의 투겁도끼이다. 도끼 머리의 소켓 횡단면이 장방형을 이루고 세 줄의 돌대가 둘러져 있으며, 도끼몸체 상단에 1개의 꼬다리가 있다. 다른 1점은 길이 11.1㎝로 날이 부채꼴을 이루고 어깨가 형성된 유견동부(有肩銅斧)로, 도끼머리에 폭이 넓은 돌대가 둘러져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형식 동부 2점이 셋트를 이루고 발견된 예로는 황해도 봉산군 송산리(松山里)의 예가 있다.

동경 2점 중 1점은 지름 13㎝의 조문경(粗文鏡)으로 거울 뒷면이 2개의 문양구(文樣區)로 나뉘고 삼각거치문(三角鋸齒文)을 별모양인 성형문으로 장식하였다. 다른 1점은 지름 10.8㎝로 테두리와 꼭지가 전형적인 세문경(細文鏡)과 같다. 문양구성은 비교적 단순하여 원권문대(圓圈文帶)로 구획된 외구(外區)와 내구(內區)에 각각 1줄의 삼각거치문이 장식되어 있다.

이밖에 공반된 청동기로 동새기개(銅鉈) 1점은 선단이 결실된 길이 15.6㎝로, 가운데가 세로로 긴 돌대가 나 있는 형식이며, 동끌(銅鑿) 1점은 길이 10.2㎝로서 횡단면 네모꼴의 막대모양으로 날끝은 편린(片鱗)을 이루고 있다.

석기돌도끼(石斧) 1점은 길이 15.8㎝인 응회암제(凝灰巖製)의 양인석부(兩刃石斧)로, 단면은 타원형이며, 조잡하게 쪼은 흔적이 있다. 숫돌(砥石) 1점은 길이 19.1㎝로 조잡한 사암제(砂巖製)의 직육면체인데, 네 모퉁이가 둥글게 되어 있다.

토기 2점 중 1점은 흑색마연장경호(黑陶長頸壺)로 높이 23㎝로 목이 유난히 길며, 동체 또한 세장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또 다른 1점은 높이 9.3㎝로서 고인돌에서 많이 출토하는 붉은간토기계(紅陶系)에 가까운 항아리로 구연이 급격히 외반(外反)되고, 앞서 검은간토기와 달리 동체(胴體)가 급격히 벌어지므로 목과 동체의 경계가 뚜렷하고, 동체의 폭이 그릇 전체높이와 비슷한 편구호(扁球壺)이다. 세형동검(細形銅劍)과 함께 붉은간토기계통의 토기가 확인된 것은 경기도 상자포리(上紫浦里)와 김해 내동(內洞)의 예가 있을 뿐으로 돌덧널무덤(土壙石槨墓)에서는 이것이 유일한 예이다.

구봉리 출토 청동유물은 그 종류를 살펴보면 방울류나 검파형동기(劍把形銅器) 등 의기류(儀器類)가 전혀 보이지 않으며, 그 대신 실용기로 쓸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청동기를 골고루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연대는 묘의 구조와 동꺾창(銅戈), 동투겁창(銅矛)의 출현, 조문경(粗文鏡)과 세문경(細文鏡)의 반출(伴出) 등으로 보아, 아직 철기문화가 도달하지 않은 청동기시대의 후기 유적으로, B.C. 3세기 말-2세기 초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참고문헌

  • 扶餘 九鳳里出土 靑銅器 一括遺物(李康承,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 198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