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고학

한국고고학

[ 韓國考古學 ]

한반도를 중심으로 그 주변지역의 선사시대 문화와 역사시대의 문화를 유물·유적과 같은 물질적인 자료를 통해 연구하는 분야로, 한국고고학이 한국 학자들에 의해 연구된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지만 많은 발전을 하여왔다. 즉 구석기문화의 존재를 찾아냈고, 독특한 청동기문화가 실재함도 밝혔다. 그리고 무령왕릉(武寧王陵)이나 천마총(天馬塚) 등의 고분발굴을 통해 백제문화신라문화의 실체를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발전은 종래 고고학이 단순히 역사학의 보조학문으로 선사문화의 복원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아왔으나 지금은 고고학이 나름대로의 연구목적을 가지고 고고학적 연구체계를 갖춘 독립적인 학문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한국고고학은 그 동안 형식분류편년의 연구를 통한 전파론적 해석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점차 이러한 경향에서 벗어나 문화의 변천과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고고학사(韓國考古學史) : 한국에 고고학이 학문적으로 들어온 것은 일제시대이나 그 이전에도 이미 고고학적인 활동이 있었다. 즉 조선시대 말에 김정희(金正喜)가 금석문(金石文)연구와 더불어 고대 유물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과 정약용의 후손인 정지해(丁志諧)가 어떤 고분을 자기 조상의 무덤인지 알기 위해 파본 일 등이 있었으나 그 후로 이러한 활동은 단절이 되었다. 또한 19세기 말 일부 서양의 외교관과 선교사들이 한국에 있는 고인돌 등 유적을 서양에 소개한 바 있으나 역시 단편적이다.

본격적인 근대 고고학의 연구는 일제의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본 학자들은 이미 19세기말부터 한국에 진출하여 유적을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한일합방 이후 본격화하였다. 최초의 발굴은 1909년 평양부근 석암리 고분에 대한 조사이다. 1919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고적조사과(古蹟調査課)가 설치되자 지표조사와 함께 고분발굴이 이루어졌고,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고적조사보고서(古蹟調査報告書)』 등의 보고서들이 간행되었다. 1935년에는 조선고적연구회(朝鮮古蹟硏究會)가 생겨 낙랑유적과 경주고분을 중심으로 한 발굴조사를 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그들의 목적에 따라 일부 고분과 일본과 가까운 낙동강하류지역을 중심으로 조사가 집중되었고 한국의 선사문화를 임의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올바른 고고학의 시작이라고 볼 수 없다. 또한 일본에 의한 불법적인 유물의 수집은 도굴을 시작하게 하였고, 그 영향은 아직까지 계속되어 고고학적 자료를 멸실시키는 심각한 결과를 낳고 있다.

해방 후 한국고고학은 처음부터 새로이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제시대 유럽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한흥수(韓興洙), 도유호(都宥浩) 등이 북한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발굴은 1946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한 경주 호우총(壺于塚) 조사이다. 그 후 1950년대는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재원)이 중심이 되어 간헐적으로 연구조사활동이 이루어졌다. 반면 북한에서는 선사유적에 대한 조사가 1950년대에 비교적 활발하였고, 그 결과 종래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로 인식되었던 청동기시대를 새로이 설정하게 이르렀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많은 변화를 보여주는데 1961년에 서울대학교에 고고인류학과가 처음으로 설치되고 김원용(金元龍)이 교수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고고학 전공자를 기르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고고미술동인회(1968년에 美術史學會로 발전됨)와 대학박물관협회가 발족되었다. 1962년에는 문화재보호법이 생기고 문화재관리국이 설치되면서 문화재 행정이 시작되었다. 또 다른 특징은 1959년 고려대학교박물관에서 실시한 진해 웅천 패총의 발굴(단장 김정학)을 시작으로 1960년대에는 각 대학박물관이 발굴에 참여하면서 전국적인 조사활동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또한 구석기시대의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즉 연세대학교박물관에서 실시한 석장리 유적의 발굴(단장 손보기)을 통해 구석기유적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북한에서는 웅기 굴포리 유적이 발굴 조사되었다.

그 밖에 국립박물관에서 실시한 지석묘의 조사연구도 선사문화를 연구하는데 큰 밑바탕이 되었다. 1967년에는 국립박물관이 중심이 되어 한국고고학회(韓國考古學會)가 창설되었다. 반면 북한에서의 선사유적에 대한 연구는 60년대 중반까지 활발하였으나 그 이후는 고조선의 중심을 평양이 아닌 요동지방으로 보는 등 관점의 변화와 함께 고고학에 대한 관심이 점차 줄어들었다.

1970년대는 건설공사에 따른 대규모의 발굴작업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즉 1971년 소양강댐발굴, 1972년 팔당댐발굴, 1975년 성산 패총발굴, 1975년 영산강댐발굴 등이 있다. 그리고 1975년에는 문화공보부에 문화재연구소(文化財硏究所)가 설치되었고, 1976년에는 전국적인 학회인 한국고고학연구회(현재는 1967년에 창설된 기존의 한국고고학회를 대신하여 한국고고학회로 발전됨)가 설립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각 지방에 고고학과가 설치되고 지역마다 각기 나름대로의 연구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즉 각 지방에도 학회가 설치되고, 많은 고고학자들이 활동하면서 발굴의 수도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의 발굴은 건설공사에 따른 구제발굴로서 과거문화를 복원하기 위한 세밀한 고고학적 자료의 수집이 이루어지지 못할 때가 많고, 때로는 급격한 건설공사의 증가에 따른 충분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고고학적 자료의 소멸이 염려되기도 한다. 또한 고고학계의 관심도 한국에서 벗어나 중국, 몽고, 연해주, 시베리아 등지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한국고고학이 세계 고고학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관심의 확대보다는 방법론의 개발 등을 통해 세계학계와의 교류확대가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고고학 시대구분 연대(韓國考古學 時代區分 年代) : 한국고고학에서 시대구분은 기본적으로 톰센(Thomsen)의 삼시대법(三時代法)을 따르고 있다. 이들 각 시대의 연대와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구석기시대(1만년 이전) : 깬석기만이 사용되던 시기이다.

② 신석기시대(B.C. 5000년~B.C. 1000년) : 빗살무늬토기, 간석기, 깬석기 등이 사용되던 시기를 말한다.

③ 청동기시대(B.C. 1000년~B.C. 300년) : 민무늬토기, 간석기, 청동기 등의 유물과 고인돌, 돌널무덤 등의 무덤이 유행하던 시기이다.

초기철기시대(철기시대 전기, B.C. 300년~기원전후) : 청동제 무기가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새로이 철기도 만들어지는 시기를 말한다.

원삼국시대(철기시대 후기, 기원전후~A.D. 300년) :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이미 삼국시대이나 고고학에서 김해시대로 부르던 시기로 원사단계의 proto-삼국이라는 의미에서 붙어진 명칭이다. 이는 ‘삼국시대 전기’라고도 불려진다.

⑥ 삼국시대(A.D. 300~660년) : 실질적으로 삼국이 형성되고 고총고분이 만들어진 시기를 말한다.

다만 중석기시대는 일부에서 존재 가능성을 주장하는 반면 아직까지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어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시대의 설정은 좀 더 시간을 두고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시대구분에는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의 개념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삼국시대 등으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주장이 있다. 이것은 우선 고고학에서 시대구분이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과 불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을 시대구분에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 시대의 연대도 14C연대에 의거해 신석기시대를 B.C. 6000~1300년경으로, 청동기시대를 B.C. 1300~300년경으로 보자는 견해도 있다.

한국고고학의 시간적인 범위를 삼국시대까지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나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포함하는 예도 있어 앞으로는 조선시대까지를 다루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 경우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시대구분은 역사학의 시대구분을 따르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삼시대법에 근거한 시대구분에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으나 아직도 이를 대치할만한 적절한 시대구분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어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 도시·문명·국가(최몽룡, 서울대출판부, 1997년)
  • 韓國考古學에 있어서 時代區分論(崔盛洛, 亞細亞古文化, 石溪黃龍渾敎授停年退任論叢, 1995년)
  • 고고학개론(이선복, 이론과 실천, 1988년)
  • 敎養으로서의 考古學(任孝宰·李鍾宣 編, 197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