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문화

신라문화

[ 新羅文化 ]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는 B.C. 57년에 건국하여 935년(敬順王 9년)까지 존속하였던 고대국가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으로 정립(鼎立)하여 있다가 7세기 중후엽 통일의 주체가 되어 제한적이기는 하나 우리 민족사상 최초로 통일국가를 건설하였다. 신라는 역사서에 따라서는 신라(新羅), 사로(斯盧), 사라(斯羅), 서라벌(徐羅伐) 등으로도 표기되어 있으며, 한편으로는 영토국가의 이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중심지를 지칭하기도 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나오는 진한(辰韓)의 12국 중 사로라는 소국(小國)에서 출발하여 통일국가인 신라에 이르기까지 그 규모나 형태가 크게 성장하여 가는 과정에도 신라의 국가 정체성과 그 지배자집단의 권력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헌기록상의 신라 건국은 고고학상으로 해석한다면 몇몇 촌락집단들 사이에 통합의 수준을 한층 높일 수 있는 정치권력이 발생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경주분지에서 이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다만 청동기시대부터 경주 분지와 그 주변에는 수많은 취락이 분포하였으며, 이러한 농경취락간에 느슨한 정치적, 혹은 경제적 연결망이 있었으리라 추측되기 때문에 이것이 발전한 상태가 사로소국(斯盧小國)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사의 발전단계를 구분할 때 우선 경주 분지의 내부와 그 주변 정도를 통합한 소국의 단계에서 주변의 소국을 복속시켜 나가는 기간까지를 1단계라고 한다면, 그 시기는 B.C. 1세기에서 A.D. 4세기 전반까지쯤이 된다. 이 기간 중에 경주 분지와 그 주변지역에는 지배자집단의 널무덤(木棺墓)군이 형성되며, 점차 분묘의 규모가 커진 덧널무덤(木槨墓)이 등장하면서 경주일원에는 대형덧널무덤이 집중되고 그 주변보다 유물부장이 대량화된 분묘가 축조된다.

그 다음은 낙동강 이동(以東)의 여러 지역을 통합하여 초보적이지만 지방지배를 시도하는 이른바 소국연맹 혹은 연맹왕국의 시기라 불리는 제2단계를 설정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삼국의 고분문화가 가장 발달하는 시기로 신라지역에서도 고총고분이 도처에 만들어졌다.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에 이르는 이 시기에는 신라의 왕호를 마립간(麻立干)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마립간시대(麻立干時代)’라고도 불리는데, 이 때 황남대총(皇南大塚), 천마총(天馬塚) 등과 같은 대형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 축조된다. 또한 경주 뿐 만 아니라 낙동강 이동의 여러 지역에서도 대형 고총고분군이 축조되는데 대구 달서(達西) 고분군, 경산 임당동(林堂洞) 고분군, 의성 탑리(塔里) 고분군, 부산 연산동(蓮山洞) 고분군, 양산 북정리(北亭里) 고분군, 선산 낙산동(洛山洞) 고분군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각 지역의 지배자집단의 분묘로 볼 수 있지만 경주중심지 고분의 부장품이나 규모에 훨씬 미치지 못하므로 신라와는 상하의 위계를 두고 정치적·경제적 관계하에 있던 집단의 고분군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문헌사에서는 연맹왕국이라 불렀던 이 시기의 정치적 실체를 고고학적으로는 어떻게 해명할 수 있는지가 삼국시대 고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연구분야가 되어 왔다. 특히 토기나 금공품의 양식적인 분포와 그 지역적 비교를 통해 제 지역집단들간의 상호관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연구들이 많이 이루어졌다.

신라사의 제3단계는 이른바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사회적 또는 이념적인 혁신과 발전을 거듭해 나가던 시기였다. 이 단계는 법흥왕대의 개혁과 제도의 정비로부터 시작하여 7세기 중엽 삼국통일의 시기에 이르기까지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시기구분을 따르면 중고(中古)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이 기간 중에는 대외적인 정복사업도 꾸준히 추진되어 법흥왕대부터 낙동강 이서(以西)지역의 가야세력을 정복하여 먼저 금관가야를 통합하고 점차 아라가야와 대가야세력까지 통합하여 서쪽으로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특히 진흥왕대에는 가야를 완전히 복속시키고 한강유역에 진출하는 한편, 동해안을 따라 함경북도까지 진출하였다. 이러한 영토확장과 더불어 이 시기의 초기까지 화려하게 발전하던 신라의 고분문화가 새로이 복속된 가야지역과 한강유역 및 함경도지역까지 확산되었는데, 독특한 짧은굽다리접시(短脚高杯), 이중입술목긴항아리(盤口長頸壺), 그리고 방형(方形)에 가까운 평면을 가진 굴계(橫穴系) 돌방무덤(石室墳)의 존재를 통해 뚜렷이 확인된다. 6세기 중엽경까지도 신라영역 내의 도처에서 고분의 축조가 성행하지만, 6세기 후반경에 접어들면서 경주와 그 주변지역을 제외하고서는 점차 고분문화가 쇠퇴하게 된다. 이는 한편으로 각 지역의 지배권력이 완전히 해체됨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의 지방지배가 간접지배에서 직접지배로 전환해 감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라사의 제4단계는 통일을 완수한 신라의 제도와 문물이 가장 번영했던 시기이다. 정치적으로는 귀족연합적인 권력구조가 쇠퇴하고 태종무열왕계의 혈통이 왕위를 독점하고 유교적 정치이념을 도입하여 전제왕권을 확립해 나간 시기였다. 문화적으로는 법흥왕대에 공인된 불교가 이 시기에 들어 가장 융성하여 불교미술이 발전하였고, 신라가 삼국의 문화을 흡수하고 당(唐)의 문화를 받아들여 국제적인 감각을 발휘하게 되는 시기이다.

묘제에 있어서는 이미 6세기 중엽에 보편화된 굴식돌방무덤이 발전하여 왕족과 귀족의 무덤형식으로 발전하고, 둘레돌(護石)을 두른 봉분의 앞에 석물이 구비된 왕릉의 형식이 정비되는 기간이다. 또한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기와, 벽돌(瓦塼)과 조형미와 장식적인 기법에서 뛰어난 감각을 살린 인화문토기(印花文土器)와 녹유도기(綠釉陶器) 등은 자기화(磁器化)의 전단계를 이미 밟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안압지(雁鴨池), 황룡사지(皇龍寺址), 서천과 북천 가까이의 금성(金城) 시가지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굴은 통일신라시대의 도시문화를 읽을 수 있는 자료 확보에 도움이 되었으며, 용강동(龍江洞) 돌방무덤(石室墳) 등의 발굴과 경주지역 곳곳에서 확인되는 화장무덤 유구 등을 통해서는 당시 귀족의 장묘문화의 일단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내물왕계임을 표방하는 원성왕(元聖王, 785~798)의 즉위 이후 중앙 귀족들의 암투와 지방 호족들이 반란으로 국가적인 혼란이 점철되는 시기를 제5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8세기 후반부터 고려에게 국권을 넘겨주는 10세기 전엽까지에 해당되는 이 시기는 정치적, 경제적 혼란과 함께 문화적으로도 쇠퇴하던 시기로, 특히 중앙문화가 쇠락하고 각 지역의 호족세력들을 배후에 둔 지방문화가 부활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신라문화는 초기에 진한의 한 소국의 문화에서 출발하여 삼국의 문화를 흡수 통합한 통일신라의 문화로 발전하였다. 초기의 문화는 다분히 진한의 보편성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었으나 3세기 후엽경부터는 독자성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질적인 면에서나 양적인 면에서 주변문화를 압도해 갔다. 특히 무덤에 부장된 양으로 가늠해 볼 수 밖에 없지만 사로국과 그 주변의 철생산은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압도적이다. 3세기 후반은 사로국이 성장하여 주변을 복속시켜 나가기 시작하는 단계로 알려져 있는데, 비단 철생산만이 아니라 가장 다양한 와질토기 기종들이 경주를 중심으로 생산되었고, 뒤에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발전하는 덧널무덤의 변형이 이 시점부터 등장한다.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 축조시기는 대체로 마립간시대라고 알려져 있거니와 신라왕권이 성장하고 지방지배에 성공을 거두면서 간접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지역적인 통합을 이루어가는 단계였다. 이 단계의 돌무지덧널무덤 문화는 상당히 이질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로만글라스를 비롯한 다량의 서방 기원의 문물, 북방유목민의 습속으로 주장되기도 하는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와 수지형관모(樹枝型冠帽) 등이 그것이다. 사실 이점은 당시의 신라문화가 대단히 보수적이고 전통적이며 토속적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실제로 북방계문화, 혹은 샤마니즘적 세계관은 이 때에 갑자기 기마민족의 이동과 함께 나타났다고 보기 어려우며, 청동기시대 이후 문화의 장기지속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비단 정치적인 통일에 그치지 않고 문화적 통일의 의미도 지닌다. 통일신라는 삼국의 문화를 골고루 섭취하는데 가령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은 고구려로부터 자극 받은 것이 분명하고 와당(瓦當)은 백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참고문헌

  • 4-5世紀 新羅의 考古學的 硏究(李熙濬, 서울大學校博士學位論文, 1998년)
  • 新羅式 木槨墓의 展開와 意義(李盛周, 新羅考古學의 諸問題, 韓國考古學會, 1996년)
  • 韓國美術史(金元龍·安輝濬, 一志社, 1993년)
  • 新羅古墳硏究(崔秉鉉, 一志社, 1992년)
  • 新羅國家形成史(李鍾旭, 一潮閣, 1982년)
  • 韓國史講座-古代編(李基白·李基東, 一潮閣, 1982년)
  • 新羅土器(金元龍, 悅話堂, 198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