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무덤

화장무덤

[ 火葬墓 ]

뼈단지. 높이(左2) 33.0cm

뼈단지. 높이(左2) 33.0cm

죽은 사람의 시신을 불에 태워 남은 뼈만을 거두거나 그것을 가루로 만든 뒤, 그것을 담아 장례를 치름으로서 생긴 무덤이다. 화장한 골회분(骨灰粉)은 들이나 물에 산골(散骨)하는 경우도 있어 화장무덤을 따로 만들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선사시대로부터 시신을 불에 태운 뒤 남은 화장골(火葬骨)이나 골회분을 용기(藏骨容器)에 담아 토중(土中)에 묻거나 아니면 특별한 시설을 한 뒤 장골용기를 넣은 화장무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화장무덤은 선사시대부터 전 세계적으로 행해졌던 묘제로서 유럽에서는 화장한 뼈를 조담아 땅에 묻은 무덤이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청동기시대에는 더욱 성행함을 볼 수 있다. 특히 B.C. 13세기 무렵부터 다뉴브강 상류로부터 독일 동남부에 이르는 중부 유럽일대에는 담아 묻은 화장무덤의 성행으로 ‘언필드(Urnfield)’라 부르는 문화기가 있었으며 그리이스나 에트루리아, 로마시기에도 화장무덤이 있었다. 가까운 중국과 일본에서는 불교전래 이전의 화장무덤이 발견된 예가 거의 없지만 일본 죠몽시대(繩文時代)의 조개무지유적에서 화장한 인골이 발견되거나 그것을 따로 수습하여 모아둔 상태로 발견된 예도 있다.

한국의 경우 화장의 풍습은 불교의 전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이전부터 화장의 풍습 혹은 화장무덤으로 간주할 수 있는 고고학자료가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가령 한국의 묘제 중에 청동기시대 이후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서 독널무덤(甕棺墓)이 있는데 크기가 작은 단지나 항아리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에는 대개 소아용의 장례법으로 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세골장(洗骨葬)이나 화장법에 따르는 2차 장법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하지만 독널무덤과 관련하여 화장과 관련된 뚜렷한 증거는 발견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최근 진주 남강댐 수몰지구의 상촌리 유적에서는 특별한 예가 발견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신석기시대 중기 무렵의 주거지 한쪽 귀퉁이에서 발견된 파묻은 매옹(埋甕)에는 화장된 골편(骨片)이 출토된 바 있어 한반도 화장무덤의 기원이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화장과 관련된 뚜렷한 예는 철기시대 후기의 대형덧널무덤에서 보인다. 김해 양동리(良洞里) 235호묘, 울산 하대(下垈) 43호묘와 같은 이른 시기 대형덧널무덤은 나무덧널(木槨)을 축조하고 그 안에 시신과 유물을 안치한 상태로 덧널에 불을 질러 태우는 장례절차를 거친 유구이다. 이러한 덧널의 화장은 중국 길림성(吉林省) 유수노하심(柳樹老河深)의 한대(漢代) 널무덤이나 덧널무덤에서도 발견된다고 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또 다른 화장무덤의 예로서 주목되는 것은 한성 백제기 묘제의 석촌동 고분군이다. 파괴된 즙석봉토분(葺石封土墳)의 가장자리에 여러 개의 나무널을 나란히 배치하였고, 화장하여 탄화된 나무널과 골편들이 발견되었다. 불교 전래와 함께 주로 백제와 신라지역에서 화장무덤이 널리 보급된 것으로 보며, 이후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화장의 예나 화장무덤을 발견하기 어렵다.

화장은 물론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불교 성립 이전의 인도지역에도 화장법이 있었다. 화장이 불교도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고, 화장한 유골을 탑(塔)이나 부도(浮屠)에 봉안하게 된 것은 석가세존의 장례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불교도의 화장은 ‘다비(茶毗)’라고 부르거니와 석가의 입적(入寂) 후 제자들에 의해 다비된 몸에서 나온 사리(舍利)를 팔등분하여 팔탑에 봉안하였다고 전해진다. 처음 인도의 불교도들에게는 화장한 뒤에 나온 사리를 사리용기(舍利容器)에 담아 탑파(塔婆)에 보관하였던 풍습은 있었지만 화장한 유골 자체를 넣어 묻어주는 장법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불교와 함께 화장법이 중국을 거쳐서 백제와 신라, 일본지역에까지 들어오면서 백제·신라·일본에서만 유골을 담아 땅에 매장하는 방법이 유행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수문제(隋文帝) 때 중국 전역에 5층 목탑을 세우고 사리용기를 봉안했다는 기록으로 중국에서도 화장이 이때부터는 본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도 불교가 수용되면서 화장무덤이 성행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삼국 중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고구려의 경우 고분벽화의 소재로 불교적인 의식이 자주 등장하고 있지만, 화장무덤의 존재가 고고학자료로 확인된 것은 거의 없다. 백제에서는 지금까지 주로 부여 근처에서 화장무덤이 발견되고 있으며 사비시대에 들어서 성행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백제의 화장무덤이란 토기 뚜껑항아리(有蓋壺)나 뚜껑합(有蓋盒)의 형식으로 마련된 장골용기(藏骨容器) 안에 화장된 유골을 넣어 땅속에 봉안한 것인데, 상금리(上錦里)의 화장무덤처럼 이중의 용기에 무덤구덩이 가장자리에는 돌을 돌려놓은 것도 있다.

장골용기에 의한 화장무덤이 가장 발달한 지역은 신라의 경주부근이다. 신라에서 화장무덤의 성행은 7세기 전반부터일 것으로 보이나 그 출현연대는 더 올려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원래 화장무덤은 특별한 구조물과 함께 발견되는 일이 거의 없고 정식조사를 거쳐 확인된 유적도 없기 때문에, 화장무덤의 발생과 전개에 대한 해명은 사실상 뼈항아리(骨壺)로 쓰인 토기의 형식적 변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경주 동천동(東川洞) 고분의 경우 돌방무덤(石室墳)과 화장무덤(火葬墓)이 공존하는 한편, 편년이 비교적 자세히 되어 있는 신라식 굽다리접시(高杯)와 함께 장골용기가 출토되고 있어 연대추정에 도움이 되고 있다. 동천동 화장무덤은 극히 작은 돌덧널의 가운데에 장골용기로 쓰인 뚜껑합이 배치되고 그 둘레에 뚜껑굽다리접시가 5점 돌려져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뚜껑굽다리접시의 형식은 늦어도 6세기 후반경까지는 편년될 수 있다. 신라 화장무덤의 변화는 출토지도 명확하지 않은 장골용기, 즉 뼈단지의 변천으로 파악되어 왔다. 대개 7세기 대까지의 뼈항아리는 전체적으로 타원형이나 구형을 한 토기 뚜껑합이 많이 쓰이고 납작한 대각이 있는 편합(扁盒)도 쓰이고 있다. 이른 시기에는 뚜껑이 무문(無文)이거나 기하학적인 무늬가 들어가는 것이 많은 반면 점차 인화문토기(印花文土器)로 바꾸어짐을 알 수 있다.

삼국통일 이후 8세기에 접어들면 장골용기가 최대로 발전하는 듯하다. 삼국의 미술 전통을 계승하고 중국 당대(唐代) 예술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통일신라 불교미술 중에 뼈항아리의 양식적 발전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초기의 것은 뼈단지를 다시 담은 외용기(外容器)가 미발달해 있지만 이 시기가 되면 토제(土製), 혹은 석제(石製)의 외용기가 성행한다. 구형(球形), 탑형(塔形)의 석함(石函)이나 도제(陶製)의 가형(家形) 외용기가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뼈단지로 쓰인 용기도 인화문토기를 비롯하여 녹유도(綠釉陶)나 당삼채(唐三彩)까지 사용되며 다양한 기종이 있다. 구형이나 장동형의 뚜껑합이 여전히 많이 사용되지만 병형(甁形), 유개완(有蓋완)이나 당삼채(唐三彩) 삼족복(三足복)도 사용되었다. 통일신라 후기가 되면 점차 장골용기의 양식도 쇠퇴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화려하게 장식된 인화문도 사라지고 기형 자체가 둔중해 보이는 등 전반적인 화장무덤의 퇴화 소멸의 과정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 慶州 東川洞 收拾調査 報告(國立慶州博物館, 國立慶州博物館年譜, 1994년)
  • 新羅藏骨容器硏究(鄭吉子, 韓國考古學報 8, 韓國考古學會, 1980년)
  • 百濟古墳硏究(姜仁求, 一志社, 197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