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채

삼채

[ 三彩 ]

경주 조양동 출토 삼채

경주 조양동 출토 삼채

토기의 표면에 연유를 시유하여 당삼채(唐三彩)와 같은 청색, 녹색, 황색의 3가지 색깔을 띠는 신라토기이다. 연유(鉛釉)란 잿물이나 규산(硅酸)에 연단(鉛丹)을 섞고 발색제(發色劑)로는 구리 또는 철분을 섞는 것을 말하며, 산화염(酸化焰)에서 구우면 청색, 녹색이 되고, 산소가 부족하거나 철분이 많으면 갈색이 되며, 환원염(還元焰)이라도 저화도(底火度)에서 구우면 갈색이 된다.

전한(前漢) 말기부터는 유약(釉藥)을 바른 도용이 출현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는 아시아 각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전통적인 한문화에 많은 변화를 가져와 화북지방(華北地方)에서는 녹유(綠釉)와 가채 도용이, 화남지방(華南地方)에서는 웨저우요를 중심으로 청자가 출현하고, 그밖에도 녹유, 갈유(褐釉), 황유(黃釉), 투명유(透明釉)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북위(北魏)의 사마금룡묘(司馬金龍墓, 481년)에서 다수의 남녀도용이 출토되었고, 육조시대(六朝時代) 후기가 되면 진묘수(鎭墓獸), 호인(胡人), 낙타 등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수당시대(隋唐時代)가 되면 정교한 백의가채(白衣加採)와 삼채(三彩) 기법에 의한 도용이 출현하게 된다. 수대의 도용은 백토(白土)로 성형소성(成形燒成)하여 가채하거나 무색의 투명유를 쓴 것으로 장성묘(長盛墓, 594년)의 출토유물로 대표된다. 또, 당대의 삼채도용은 측천무후(側天武后) 때 영태공주묘(永泰公主墓)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철, 아연, 동, 코발트, 망간 등을 배합한 유약을 사용하여 소성(燒成)하면 황(黃)·녹(錄)·남(藍)·백(百)색을 내게 되는데 이들은 장안(長安), 낙양(洛陽)을 중심으로 성행하다가 당대 이후에는 그 모습을 감추고 있어 연대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물로 인정되며, 산시성의 장회태자묘, 의덕태자묘(懿德太子墓), 이정묘(李貞墓) 등에서 출토 예가 알려져 있다.

경주 조양동에서 출토된 당삼채(唐三彩) 골호(骨壺)가 삼채의 대표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당삼채로 만들어진 도용들은 인물, 동물, 생활용구, 건조물, 진묘수와 십이지상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자유스러운 표현기법을 읽을 수 있으며, 특히 초당기(初唐期)의 인물은 날씬하고 아름다운 몸매를 표현하다가 성당기(盛唐期)에는 풍만한 모습으로 변한다. 그리고 인신수면(人身獸面)의 십이지상이 나타나고, 복식(服飾)에서는 복두(복頭)가 성행하였다고 알려져 왔는데, 산시성 서안당묘(西安唐墓)에서 출토된 유물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당대의 삼채도용은 당육전(唐六典)의 규정에 따라서 장작감(將作監) 진관서(진官署)에서 제작, 관리하며 귀족의 장례시에 하사한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이러한 당삼채의 요지(窯址)는 허난성 궁현소 황치촌의 궁현요라 알려지고 있는데, 이 가마가 곧 장작감 진관서의 통제하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한 삼채는 안사(安史)의 난 이후에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의 토용은 이러한 중국의 발달과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년)
  • 韓國의 美術 1-新羅土器(金元龍, 悅話堂, 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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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채낙타 당

삼채낙타 당 출처: 미술대사전(용어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