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용

토용

[ 土俑 ]

경주 황성동 돌방무덤 출토 유물(토용)

경주 황성동 돌방무덤 출토 유물(토용)

토제유물(土製遺物) 중 독립된 형식의 상(像)들을 지칭한다. 신라의 토제 유물 중에는 인물·동물·기물(器物)을 본뜬 특이한 형태의 유물이 적지 않게 알려져 있다. 이들을 크게 나누면 지금까지 이형토기(異形土器)라 불려온 이른바 상형토기(像形土器)와 독립된 형태의 토용, 그리고 장식용의 작은 토우(土偶)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 독립된 형태의 토우라는 말로도 쓰였던 토용은 중국에서의 도용(陶俑)과 같은 성격으로, 인물이나 동물을 본떴으나 상형토기와 같은 중공(中空)의 기형(器形)이 아니라 독립된 형식의 상들이다.

중국의 도용은 그 역사가 상당히 길어서 은주시대(殷周時代)부터 이미 그 예가 알려져 왔다. 부장용 명기(明器)의 일종으로서, 노예제(奴隸制)와 함께 순장제도(殉葬制度)가 성행하였던 상주시대(商周時代)에는 부장용의 명기로 도제(陶製)·석제(石製)·옥제(玉製)의 남녀용과 동물용이 출토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가 되면 노예제가 봉건제로 바뀌면서 순장을 비례(非禮)로 간주하여 폐지하자, 생산력이 증가함으로써 도용의 발달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진대(秦代)에 이르면 시황제(始皇帝)의 능묘(陵墓) 전방에서 나온 방대한 양의 병마용(兵馬俑)이 말해주듯, 사실감이 넘치는 등신대(等身大)의 인물·말 등을 흙으로 제작, 부장 하였다. 이들은 신체 각각의 부위와 발판을 따로 대강 만들어 접합하여 뼈대를 구성하고 외모를 다듬어 수염·눈·입·옷 등을 조각하고 틀에서 만들어 낸 뒤, 코를 붙인 뒤 말려서 구운 다음 가채(可採)하는 것이다. 진대의 도용을 부장하는 습관과 후장제(厚葬製)는 한대(漢代)에도 크게 발달하였다. 인물·동물·건축물·생활용구 등 내용물이 풍부해지고 감정이나 생활을 실감나게 나타내고 있다. 토제·금속제·목제 등 소재도 풍부하여, 초(楚) 장사(長沙)의 한대 대후부인묘(軑後夫人墓)에서 출토된 162점에 이르는 채색목용(彩色木俑)이 유명하다.

전한(前漢) 말기부터는 유약(釉藥)을 바른 도용이 출현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는 아시아 각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전통적인 한문화에 많은 변화를 가져와 화북지방(華北地方)에서는 녹유(綠釉)와 가채 도용이, 화남지방(華南地方)에서는 웨저우요를 중심으로 청자가 출현하고, 그밖에도 녹유(綠釉), 갈유(褐釉), 황유(黃釉), 투명유(透明釉)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북위(北魏)의 사마금룡묘(司馬金龍墓, 481년)에서 다수의 남녀도용이 출토되었고, 육조시대(六朝時代) 후기가 되면 진묘수(鎭墓獸), 호인(胡人), 낙타 등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수당시대(隋唐時代)가 되면 정교한 백의가채(白衣加採)와 삼채(三彩) 기법에 의한 도용이 출현하게 된다. 수대의 도용은 백토(白土)로 성형소성(成形燒成)하여 가채하거나 무색의 투명유를 쓴 것으로, 장성묘(長盛墓, 594년)의 출토유물이 대표적이다. 또한 당대의 삼채도용은 측천무후(側天武后) 때 영태공주묘(永泰公主墓)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철·아연·동·코발트·망간 등을 배합한 유약을 사용하여 소성(燒成)하면 황(黃)·녹(錄)·남(藍)·백(百)색을 내게 되는데, 이들은 장안(長安)·낙양(洛陽)을 중심으로 성행하다가 당대 이후에는 그 모습을 감추고 있어 연대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물로 인정되며, 산시성의 장회태자묘·의덕태자묘(懿德太子墓)·이정묘(李貞墓) 등에서 출토 예가 알려져 있다. 경주 조양동에서 출토된 당삼채(唐三彩) 골호(骨壺)도 그 대표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당삼채로 만들어진 도용들은 인물·동물·생활용구·건조물, 진묘수와 십이지상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자유스러운 표현기법을 읽을 수 있으며, 특히 초당기(初唐期)의 인물은 날씬하고 아름다운 몸매를 표현하다가 성당기(盛唐期)에는 풍만한 모습으로 변한다. 그리고 인신수면(人身獸面)의 십이지상이 나타나고, 복식(服飾)에서는 복두(복頭)가 성행하였다고 알려져 왔는데, 산시성 서안당묘(西安唐墓)에서 출토된 유물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당대의 삼채도용은 당육전(唐六典)의 규정에 따라서 장작감(將作監) 진관서(진官署)에서 제작, 관리하며 귀족의 장례시에는 하사한 것으로 기록이 전한다. 이러한 당삼채의 요지(窯址)는 허난성 궁현소 황치촌의 궁현요라 알려지고 있는데, 이 가마가 곧 장작감 진관서의 통제하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한 삼채는 안사(安史)의 난 이후에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의 토용은 이러한 중국의 발달과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신라의 것이라고 하는 인물상과 동물상들이 있다. 10-20㎝ 내외의 크기에 소박하나 풍부한 얼굴의 표현 등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게 한다. 기마상(騎馬像)·주악상(奏樂像) 등을 비롯하여 독특한 몸짓을 나타내고 있는데, 남녀상 중에는 원통형(圓筒形)의 하반신에 성기(性器)를 극명하게 표현한 경우가 눈에 띈다. 이것은 성기숭배사상(性器崇拜思想)에서 연유한 풍요(豊饒)의 기원을 담은 것이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은 그 출토지나 출토상태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 성격을 파악하기가 매우 곤란한 형편이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경주시내의 몇몇 유적에서 출토 예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경주 장산(獐山)의 훼손된 한 돌방무덤에서 토우가 출토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것이 있다. 토우총(土偶塚)이라 명명된 이 고분은 남벽의 중앙에 널길이 있고, 벽은 바닥에서 1m 가량 올라가 다시 안쪽으로 좁혀 천장을 큰돌로 막았다. 널방에는 3개의 주검받침(屍床)이 놓였으며, 여기서 토용과 토기가 출토되었다. 반출 토기는 안압지나 충효리 고분 출토품과 함께 통일신라 토기의 특성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이며, 널방의 네 모퉁이에서 출토된 토용은 출토상태를 알려주는 예로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또, 경주시내 용강동·황성동 등지의 돌방무덤에서 토용이 출토되었다. 용강동 돌방무덤은 1986년 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사방 2.6m, 높이 3m의 돌방에 길이, 너비, 높이가 1.5×1.0×0.45m의 널길이 달린 무덤이다. 돌방에는 하나의 주검받침이 있으나 그 크기로 보아 합장도 가능한 정도이다. 이 주검받침 밖에서 토기, 인물토용, 동물토용 및 동제(銅製)의 십이지상이 출토되었다. 이들 토용은 가채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당시의 인물·복식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황성동 돌방무덤은 지름이 14m에 이르는 봉분을 가졌으며, 유구(遺構)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서벽(西壁)에 남북으로 하나의 주검받침(屍床)이 있고, 남쪽에서 동편으로 치우쳐 짧은 널길이 이어지는 ‘ㄱ’자형 돌방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돌방의 교란부분(攪亂部分)과 바닥에서 6점의 인물 토용과 소·말, 그리고 수레바퀴가 출토되었다. 이들 토용 역시 의복·관모 등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년)
  • 日本陶磁全集 3-土偶·埴輪-(小林達雄·龜井正道, 東京 中央公論社, 1977년)
  • 신라의 토우(이난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6년)
  • 埴輪の古代史(增田精一, 東京 新湖社, 1976년)
  • 陶磁大系 3-埴輪-(小林行雄, 東京 平瓦社, 1974년)
  • 中國の土偶(佐藤雅彦, 東京 美術出版社, 1965년)
  • 三國時代動物形土器試考(金元龍, 美術資料 6, 國立中央博物館, 196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