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동 돌방무덤

황성동 돌방무덤

[ 慶州 隍城洞 石室墳 ]

지역 경주
황성동 돌방무덤 전경

황성동 돌방무덤 전경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황성동(隍城洞) 524-1번지 경주시내의 북쪽 교외에 위치하는 고신라말 또는 통일신라시대초의 돌방무덤(石室墳)이다. 고분은 군집을 이루지 않고 평지에 단독으로 조영되어 있는데, 1987년 아파트 건립부지 조성공사로 인해 대부분 파괴된 것을 국립경주박물관이 발굴하였다.

고분은 봉분이 들어서는 직경 14m의 평면 원형 지면을 15㎝ 가량 파내고 점토를 깔아 기반을 조성하고 그 위에 축조되었다. 봉분의 기저에는 돌아가며 둘레돌(護石)을 돌렸는데, 일반적인 둘레돌과는 달리 바닥에 냇돌(川石)로 된 기초부를 마련하고 그 위 가장 바깥에 대형의 깬돌을 면석(面石)이 되게 놓으면서 그 안쪽과 위쪽의 봉분 가운데의 일정한 범위까지 깬돌을 채워 봉분과 일체를 이루게 한 특징이 있다. 봉분의 중앙에 남향하여 축조된 널방(玄室)은 남~북 2.6m, 동~서 2.3m 크기의 장방형(長方形)이다. 널방은 벽이 들어설 부분을 더 파고 여기에 냇돌을 채워 기초부를 만들고 축조되었다.

널방은 화강암괴석으로 축조한 서벽과 남벽 하단만 남아 있었는데 바닥에서부터 비스듬히 좁혀져 올라가게 축조되었다. 널방의 내부 서벽에 붙여 길게 주검받침(屍床)이 마련되었다. 주검받침은 고운 점토에 길이 2~3㎝ 되는 바닷가돌을 섞어 구축한 특수한 것이었는데 널방의 주검받침을 제외한 전면에 5㎝ 두께로 자갈을 깔아 이 바닥면에서 5㎝ 높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주검받침의 크기는 길이, 너비가 2.1×0.85m 정도로 추정되었다. 주검받침의 측면과 널방의 바닥에는 회칠한 흔적이 있었다. 널길(羨道)은 널방의 남쪽에 두었고 동벽의 연장선이 널길의 동벽이 되게 한 우편재로 축조되었다. 널길의 크기는 길이 1.7m, 입구너비 0.95m이고, 원래 높이는 1.0m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널길에서 이어지는 무덤길(墓道)은 ‘八’자형으로 가장 바깥 부분의 너비가 5.7m였다. 이 무덤길의 앞에 해당되는 봉분의 바깥에서는 땅을 파고 할석으로 채운 상석(床石)의 기초부가 조사되기도 하였다.

돌방 전체가 이미 교란되어 유물의 매납양상을 파악할 수 없었으나 무덤에서는 여인상, 남자문관상, 남자상, 무인상, 남자문관상 머리 등의 토용(土俑)과 소상·말상의 머리, 수레바퀴, 수레갖춤 등의 상형토기(像形土器), 베게(頭枕), 어깨받침(肩臺), 발받침(足座), 하대석(下臺石) 등의 석제품이 출토되었고, 봉토에서는 다수의 인화문(印花文)토기편, 굽다리편, 유개합편(有蓋盒片) 등의 토기류와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가운데 인물을 형상화한 토용은 모두가 담회색으로 고운 점토를 태토로 한 도질소성이었고, 상형토기는 좀더 짙은 회색이나 회청색으로 세석립(細石粒)을 섞은 점토를 태토로 하였고 소성도도 인물상들보다 강한 특징이 있다.

인물상의 남자는 당(唐)의 복식(服飾)을 나타내는데 비하여 여자는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신라의 복식이 남자는 649년(진평왕 3년), 여자는 664년(문무왕 4년)에 당의 복식으로 바뀐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으로 보아 그 사이의 기간에 무덤이 축조되었음을 알려준다. 고분의 주인공은 출토된 홀(笏)을 들고 있는 남자문관상이 시립(侍立)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점,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진골이 홀을 잡을 수 있다는 기록 등에 의해 왕에 준하는 지위에 있던 사람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慶州 隍城洞 石室墳(國立慶州博物館·慶州市, 199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