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단지

뼈단지

[ 骨壺 ]

경주 출토 뼈단지

경주 출토 뼈단지

‘장골용기(藏骨容器)’라 부르기도 하는 것으로 사람의 시체를 화장한 뒤 뼈를 추려 담아 땅에 매장할 때 사용하던 용기이다.

화장(火葬)은 시신을 처리하는 장법(葬法)의 하나로 고대로부터 많이 이용되던 것이다. 사람을 불에 태우는 것은 이승과 이승에서 살았던 육체를 더러운 것으로, 저승을 깨끗한 곳으로 보고, 영혼을 깨끗한 것으로 재생산 또는 재탄생시킬 수 있는 힘을 불어넣는 것이 정화력이 있는 불로 육신을 태우는 것이라는 관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화장에는 육신을 불에 태우고 남은 뼈를 땅에 매장하여 화장무덤(火葬墓)을 만드는 방법과 화장뼈를 빻아 물이나 산천에 뿌리는 산골(散骨)의 방법이 있다. 따라서 골호란 앞의 화장무덤에 사용되는 장구(裝具)의 일종이 된다.

석함 안의 녹유 장골용기

석함 안의 녹유 장골용기

화장은 특히 불교의 장례인 다비(茶毘) 또는 도유(闍維)라고 부르는 의식에서 보듯이 불교와 관련된 풍습의 하나이다. 따라서 청동기시대에 이미 화장이 있었다고 주장되기도 하나 한국에서 화장의 풍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삼국시대 말인 7세기 무렵 불교식 장례가 발생하면서부터로 추정된다. 그 뒤 화장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극히 성행하였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식 관혼상제가 행하여지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화장의 풍습이 남아 있으나 뼈단지 등을 사용하는 화장무덤 풍습은 없어지고 불교식의 다비와 산골만 전해지고 있는데, 산골의 경우는 1912년 일제 때 제정된 규칙에 의한 것으로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화장은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7-10세기 신라왕들의 장례기사에 많이 보이고 있고, 이 시기의 무덤들이 이전 시기에 비하여 많이 조사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시기에 얼마나 성행하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화장된 뼈를 단지에 담아 매장하는 방식은 2차장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뼈단지를 바로 땅을 파서 매장하는 방식도 있으나, 돌널(石棺)이나 돌덧널(石槨), 또는 돌방(石室)을 축조하고 여기에 뼈단지를 넣어 매장하는 방식도 있다. 하나의 무덤에 사용되는 뼈단지의 수는 일정하지 않으나 뼈를 직접 담는 내용기(內壺)와 이 내용기를 넣는 외용기(外壺)로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내용기 하나만을 사용하거나 외용기 안에 작은 내용기 3-6개를 넣거나 2개를 상하로 포개놓은 경우도 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내외 용기는 토제품이 대부분이나 외용기는 석제품인 경우도 있고 드물지만 내용기를 중국의 삼채(三彩)나 청자제품을 선택한 경우도 있다.

삼국시대 말 백제의 뼈단지는 회백색을 띤 고온의 경질토기를 사용하였으며 항아리형태가 가장 많고 무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신라의 뼈단지는 대부분 신라토기로 특별히 고안 제작된 전용토기를 사용하였는데, 대략 5기로 나누어 변천을 살펴볼 수 있다. 1기(불교공인 528년-삼국통일 668년 이전)에는 고신라토기 기형과 동일한 것을 사용하는 특징이 있고, 둥근항아리와 작은 투공(透孔)의 굽이 달린 난형합(卵形盒), 구형합(球形盒) 등에 횡침선대문(橫沈線帶文), 정원문(正圓文),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 등이 시문된다.

2기(668년-8세기 이전)에는 1기의 구형합 기형을 계승한 맺음고리달린합이 고안되었다. 이것은 뚜껑 사방과 몸체 사방에 갈고리형 고리를 부착하여 이들을 철사 등으로 짜매어 결박하는 것이다. 무늬로는 기면 전면에 겹반원수직연속문(重半圓垂直連續文)이 연주화형문(蓮珠花形文)과 결합한 압인문(押印文)이 시문된다. 3기(8세기 상반기)에는 갈고리형 이외에 구멍이 위에서 아래로 뚫린 고리, 구멍이 옆으로 뚫린 고리를 단 맺음고리달린합이 보편화되며 그 기형도 구형에서 변화하여 말각구형화(末角球形化)한다. 외용기로서 돌함(石函)이 제작되고 당삼채(唐三彩)가 내용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토기의 문양은 연속호문(連續弧文)에 연주화형문(蓮珠花形文), 사판화문(四瓣花文) 등을 매단 연속호문영락문(連續弧文瓔珞文)이 특징이다.

4기(8세기 하반기)에는 3기의 맺음고리달린합이 여전히 유행하나 기형이 커지고 통형(筒形)화하며 둔중해진다. 토기의 무늬는 연속호문영락문이 유행하나 3기와 같이 기면 전면에 시문되지 않고 저부에는 무늬를 넣지 않는다. 그리고 1기에 유행하던 횡침선문이 다시 등장한다. 5기(9세기 이후)에는 여전히 맺음고리달린합이 주류를 이루고 4기와 같이 기형은 둔중한 통형이다. 무늬는 압인문이 거의 소멸하고 1·4기와 같은 횡침선문만 남는다. 내용기로 청자를 사용한 경우가 있다. 이상의 기형과 무늬 외에 뚜껑의 꼭지도 시기에 따라 변화한다. 신라 골호의 뚜껑 꼭지에는 불교의장인 보주형(寶珠形)과 산개보륜형(傘蓋寶輪形)이 가장 많으나 작은항아리형(小壺形), 둥근고리형(環形) 등도 성행하였다.

보주형은 전시기에 나타나는데 1기에는 작고 정교하며 뾰족한 보주형이 유행하였다. 2기와 3기에는 원추형의 보주형이 유행하였다가 4기와 5기에는 연꽃봉오리 정도로 커진 둔중한 원추형의 보주형이 유행하였다. 산개보륜형은 1-4기에 제작되었는데, 1기에서는 불탑상륜부(佛塔相輪部)의 산개보륜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3단 산개보륜의 직경이 넓고 납작하나 2-3기의 것은 구슬처럼 양감을 가지는 3단 보륜형이 되며 매우 정교하게 발달한다. 이것은 4기에는 점점 쇠퇴하여 5기에는 없어진다.

고려시대에는 내용기로 자기나 목제품을 사용하였고, 외용기로는 조립식의 6면 돌널을 사용하였다. 돌널에는 화려한 그림을 선각한 것이 보통인데 사신도(四神圖)나 비천상(飛天像) 등이 그림의 주제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후 뼈단지는 소멸하고 화장인골을 돌널을 비롯한 장구에 직접 매장하는 풍습으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 新羅時代의 火葬骨藏用土器 硏究(鄭吉子, 崇實大學校博士學位論文, 1989년)
  • 新羅藏骨容器硏究(鄭吉子, 韓國考古學報 8, 1980년)
  • 百濟의 火葬墓(姜仁求, 考古美術 115, 197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