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당유학생

도당유학생

[ 渡唐留學生 ]

시대명 고대/남북국

때 당나라의 에 입학하여 수학한 유학생.

유학생의 파견은 선덕여왕 대부터 비롯되었는데, 당의 문화정책으로서 국학의 문호 개방책과 신라가 당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문화적 욕구, 그리고 삼국 항쟁기에 당의 힘을 이용하려는 외교적인 목적이 합치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통일 후에는 이들을 (宿衛學生)이라고 했는데, 이는 「일종의 질자(質子)로서의 유학생」이라는 의미이나 실제로는 신라가 당의 문물을 수입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의 표현이었다. 이들은 유학에 필요한 숙식과 의복은 당의 홍로사(鴻臚寺)에서 지급을 하고 서책구입에 필요한 비용은 신라가 지불하는 관비유학생이었으며, 국가가 이들의 파견과 귀국을 관장하고 있었다. 이들의 수학연한은 10년이며, 배우는 분야는 유학이외에도 음양학·역학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유학생의 신분은 통일 초엔 주로 진골출신이 파견되었으나 하대로 들어오면서 점차 6두품 이하 출신이 그 주류를 형성해갔다. 신라 하대에는 이러한 관비유학생 외에 사비(私費)로 당에 건너가 유학하는 부류도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6두품이었다.

골품제도라는 신분제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사회적 제약과 정치적 한계성을 어쩔 수 없었던 이들 6두품은 도당유학을 하나의 탈출구로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당유학생들은 9세기 초 당에서 (賓貢科)를 설치하자 많은 합격자를 내기 시작했으며, 개인적 능력 여하에 따라 당의 관리로 임용되기도 했다. 이들은 도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거나 승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신라 사회의 한계성과 신라사회의 현실적 모순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도당유학생들은 귀국 후 변변치 못한 대우로 인해 체류기간이 지난 이후에도 당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경향이 많았으며, 신라로 돌아온 지식인 중에는 ·과 같이 개혁을 주장하다 은둔해버리는 부류도 있었다. 한편 지방과 결탁하여 신라지배체제에 대항한 부류도 등장하는데 ·최신지()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