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최치원

[ 崔致遠 ]

시대 남북국
출생 - 사망 857년(헌안왕 1년) ~ 미상
이명 : 고운(孤雲), 해운(海雲)
직업 학자

말기의 학자.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868년 12세의 나이로 당에 유학하여 18세에 에 합격, 그곳에서 지방 또는 중앙관청에서 벼슬을 지냈으며,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종사관으로 가서 격문(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 이름을 높이기도 했다. 885년 귀국, 한때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翰林學士守兵部侍朗知瑞書監)을 지냈으며, 894년(진성여왕 8)에는 시무 10여조를 내 관등이 아찬에까지 이르렀다. 이 시무 10여조의 개혁안은 골품제도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유교적 전제왕권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시무책은 진골들의 반대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결국 중앙 귀족들의 배척을 받아 지방 관리로 밀려났고, 이후 그는 방랑생활 끝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최치원은 낡은 골품적 질서를 깨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한 지식인이었으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은둔생활을 택했으며, 지방과 결탁하여 신라정부에 대항하는 등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적극적인 길을 택하지는 않았다. 특히 지배체제에 항거하여 일어난 농민봉기에 대해서는 완전히 적대적인 태도를 취해 지배층으로서의 입장을 보였다. 그는 유교를 바탕으로 불교·도교 등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의 사상을 전개했는데, 그의 저작으로 현존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문집으로 알려지고 있는 계원필경>이다. 그 외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몇 가지 글이 전하며, 특히 그가 쓴 승려들의 비문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를 (四山碑銘)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