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

강수

[ 强首 ]

시대 남북국
출생 - 사망 미상 ~ 692년(효소왕 1년)
이명 초명 : 자두(字頭)
직업 유학자, 문장가

의 유학자, 문장가. 중원소경(中原小京, 지금의 충주)의 사량(沙粱) 사람으로 본래는 출신.

아버지는 나마(奈麻) 석체(昔諦)라 하는데 6두품으로 보인다. 본래 이름은 자두(字頭)였으나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있어 이 「강수선생」이라 부른 것을 계기로 강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일찍이 아버지가 「불도를 배우겠는가, 유도를 배우겠는가?」하고 물었을 때 「불도는 세외교(世外敎)라 하는데 속세의 사람으로 어찌 불도를 배우겠습니까?」라 하며 유도를 택했다고 한다. 그는 유교적인 실천도덕과 아울러 문자와 문학에 관한 것에 비중을 두어 유학자로서보다 문장가로서 유명해졌다. 무열왕 때에는 당·· 등에 보내는 외교문서 작성을 전담했는데, 특히 당시 당나라에 갇혀있는 김인문을 석방해 줄 것을 청한 는 당 고종을 감동시켜 김인문을 돌려보내게 했으며, 671년( 11)에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에게 보내는 글도 지었다.

청년시절에 자기보다 천한 부곡(釜谷)의 대장장이 딸과 정을 통하고 있었는데, 그가 20세가 되었을 때 부모가 명성에 맞는 신분의 여자와 혼인할 것을 권하자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바가 아니지만 도를 배우고 행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라고 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진골들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항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강수는 신라에서 유학자라 할 수 있는 최초의 인물로서, 유교의 합리주의 정신에 입각한 도덕적인 새로운 가치관은 미천한 신분의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는 등 전통적인 윤리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