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

신문왕

[ 神文王 ]

시대 남북국
출생 - 사망 미상 ~ 692년
본명 김정명(金政明), 김명지(金明之)
이명 : 일초(日招)
직업
재위기간 681년 ~ 692년

제31대 왕. 재위 681~692. 이름은 정명(政明)·명지(明之), 자는 일초(日招).

의 장자로서 왕위에 올라 왕권 강화와 제도정비에 힘을 기울여 전제왕권 중심의 통치질서를 완비했다. 왕이 즉위하던 해 왕의 장인인 김흠돌을 비롯한 귀족들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이를 모두 평정한 후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전제왕권의 확립을 꾀했다. 682년 동해에서 얻었다는 (萬波息笛)은 이러한 반란과 같은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려는 왕실의 소망이 담겨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해에 (國學)을 설립했는데 이 또한 유교정치이념을 도입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한편 삼국을 통일한 뒤 증대한 중앙관서의 업무와 확대된 영역의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정비도 이루어졌다. 공장부감(工匠府監)과 예작부경(例作府卿) 등을 두어 중국의 6부관서 업무를 모두 관장할 수 있는 중앙관서의 체제를 완비했고, 685년에는 제를 정비하고 9주제를 완성하는 등 지방통치체제를 완비했으며, 또한 중앙군사조직으로 을 완성했다. 이러한 관제정비와 아울러 689년에는 을 폐지하고 관리들에게 해마다 세조(歲租)를 차등 있게 지급토록 했는데(), 이것은 녹읍을 통한 관리들의 경제력 확대를 억제시킴으로써 전제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편 687년에는 직계조상인 태조대왕(太祖大王)·진지대왕(眞智大王)·문흥대왕(文興大王)·태종대왕(太宗大王)·문무대왕(文武大王)의 5묘제(廟制)를 확립하여 중대 왕실의 정통성을 수립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