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

국학

[ 國學 ]

시대명 고대/남북국

의 중앙교육기관.

682년( 2)에 완성되었으나 그 준비 작업은 651년(진덕여왕 5)부터 이루어졌다. 때 태학감(太學監)이라 하다 때 다시 국학으로 고쳐 불렀다. 국학의 교수과목은 <논어> <효경>을 공통필수로 하여 경학을 위주로 하고 문학을 부차로 교육했으며, 그 외 수학 등의 과목이 부수적으로 부과되었다. 국학의 학생은 원칙적으로 왕경인(王京人)에 한했으며, 15세에서 30세까지 학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보통 9년을 기한으로 하였으며, 학업을 마치면 나마 또는 대나마의 관등을 주었다. 9년 동안의 학업 끝에 겨우 대나마가 될 뿐이므로 진골에게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며 주로 6두품이 입학했을 것으로 보인다.

유교 교육기관인 국학의 설치는 유교 정치이념에 대한 이해를 통해 전제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국학설치의 준비작업이 김춘추가 실세로 있던 진덕여왕 때 이루어졌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김춘추는 국학을 통해 유학교육을 받은 관리를 양성하여 진골귀족의 세력에 대항하는 6두품 출신의 신진 세력을 기용, 전제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것은 중대 전제정치제제가 완비되는 신문왕 때 완성되는데, 이때 국왕 중심의 행정기구에서 국학출신 유학자들이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를 고집하는 진골귀족들의 외면으로 더 이상의 발전은 보지 못했고 신라 하대에 이르면 그중요성이 점점 감소하여 국학은 쇠퇴하게 된다. 이에 따라 국학의 강화책으로 788년( 4)에 를 설치하였고, 799년(소성왕 1)에는 청주(淸州, 지금의 진주) 지방의 노거현(老居縣)을 학생으로 삼아 국학에 입학한 학생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대에는 들이 점점 증가하여 국학 출신자들을 압도, 새로 대두하는 지식층의 주류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