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종 24년, 기축년(己丑年), 1529년

조선 중종 24년, 기축년(己丑年), 1529년

1월 6일

• 김석철(金錫哲)을 한성부좌윤, 박광영(朴光榮)을 우윤으로 삼음.

1월 13일

• 육조(六曹) 낭관(郞官)이 문음으로서 형조와 호조의 정랑(正郞)이 된 자는 모두 문신으로 대체하도록 함.

2월 1일

• 흙비가 내림.

2월 2일

• 친잠단(親蠶壇)의 터를 옛 단에서 조금 물려서 새 단을 쌓도록 함.

• 최세절(崔世節)을 한성부우윤으로 삼음.

2월 9일

• 임금이 선농(先農)에게 제사하고, 친히 적전(籍田)을 갊.

2월 14일

• 임금이 인정전 뜰에서 문신을 시험함.

2월 19일

• 견항(犬項) 수축은 당령수군(當領水軍) 대신에 양주(楊州)와 광주(廣州)의 연호군(烟戶軍)으로 하게 함.

3월 3일

• 임금이 훈련원(訓鍊院)에서는 기영(耆英)에게, 반송정(盤松亭)에서는 경연관(經筵官)에게 잔치를 내림.

3월 12일

• 임금이 선릉(宣陵)에 친제(親祭)하고, 제천정(濟川亭)에서 풍악을 울리고 뱃놀이를 하고 환궁함.

3월 18일

• 임금이 반송정(盤松亭)에서 친열(親閱)함.

3월 20일

• 능에 제사한 뒤에 풍악을 울리지 말도록 함.

3월 27일

• 왕비가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를 거느리고, 창덕궁(昌德宮) 후원(後苑)에서 친잠(親蠶)함.

• 중외(中外)에 농상(農桑)을 장려하는 교시(敎示)를 반포함.

3월 30일

• 빙고(氷庫) 근방에 사는 사람들이 고역(苦役)을 꺼려 타역(他役)에 종사하게 하는 폐단이 있어, 빙부(氷夫)가 30명이나 모자라니, 관장하는 각부(各部)로 하여금 법사(法司)에 고하고 근방에 사는 사람을 찾아서 충정(充定)하도록 함.

4월 1일

• 임금이 후원 춘당대(春塘臺)에서 무신의 시사(試射)를 봄.

4월 10일

• 한성부우윤과 판윤을 지낸 손중돈(孫仲暾)이 죽음.

4월 17일

• 가뭄이 심하므로 한성에서의 영선을 정파(停罷)하게 함.

5월 6일

• 영양군(永陽君)과 의혜공주(懿惠公主, 중종의 딸)의 가사(家舍) 수리에 들어가는 재목을 줄이도록 함.

5월 19일

• 종묘와 사직에 비를 빌게 함.

5월 21일

• 한성의 낙천정(樂天亭)과 망원정(望遠亭) 근방에도 황충(蝗蟲)의 피해가 극심함.

5월 24일

• 건춘문(建春門)에 익명서 화살이 꽂힘.

5월 26일

• 양주(楊州) 등 경기 고을에 벌레가 생겨 곡식을 해침.

6월 16일

• 홍언필(洪彦弼)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7월 4일

• 가뭄 때문에 한성과 지방의 시추잡범(時推雜犯)과 도(徒) 이하를 소방(疏放)시킴.

8월 2일

• 이사균(李思鈞)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8월 11일

• 남세준(南世準)을 한성부우윤으로 삼음.

8월 19일

•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사열(査閱)함.

8월 28일

• 심한 흉년이므로 호조에 항공(恒貢)도 견감(蠲減)하도록 함.

8월 29일

• 송세형(宋世珩)이 별와서(別瓦署)의 폐단 등에 대해 상소함.

9월 4일

• 김근사(金謹思)를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가자(加資)하여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9월 9일

• 한성부우윤을 지낸 허굉(許硡)이 죽음.

9월 17일

• 한성부좌윤 윤탁(尹倬)이 한성부는 업무가 많은 곳인데 성균관동지사(成均館同知事)를 겸하고 있어 좌윤직을 체직함.

9월 25일

• 한성부우윤을 지낸 이자견(李自堅)이 죽음.

10월 11일

•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친열(親閱)함.

11월 18일

• 사관(史官)과 중사(中使)를 보내 가져온 성균관과 사학(四學) 유생들의 도기(到記)에 의해 과거를 보여 취재하도록 함.

11월 20일

• 삼궁(三宮)을 영선(營繕)하는 역사를 정지하도록 함.

11월 23일

• 흉년이므로 직전(職田)을 급여하지 말도록 함.

11월 25일

• 성균관과 사학(四學) 유생들을 인정전(仁政殿)에서 시험 보임.

12월 20일

• 굶주린 백성을 진휼(賑恤)하지 않은 서부(西部) 참봉(參奉)을 금부에 내려 추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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