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7년, 갑술년(甲戌年), 1574년
1월 1일
• 이이(李珥)가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림.
1월 22일
• 임금이 교서관에 《사서오경(四書五經)》및 《대학혹문(大學或問)》, 《사략(史略)》2질을 현토(縣吐)하여 들여오게 함.
2월 7일
• 임금이 향약의 거행을 민생이 회복된 뒤로 연기하도록 함.
2월 8일
• 한성부판윤 강섬(姜暹)과 공조판서 박영준(朴永俊)을 신병으로 체직함.
2월 12일
• 성균관 유생들이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 · 조광조(趙光祖) · 이언적(李彦迪) · 이황(李滉)의 문묘종사와 정업원 혁파 · 향약 시행 등을 상소함.
3월 8일
• 정묘년(1567) 이후 사대부들이 외람되게 차지한 해택(海澤, 간석지)과 관둔전(官屯田)을 모두 몰수하게 함.
4월 16일
• 임금이 경회루 아래에서 2품 이상의 문무관을 시험보임.
4월 20일
• 임금이 태릉(泰陵) · 강릉(康陵)에 제사함.
5월 3일
• 정시 유생(庭試儒生) 중 2일에 치른 시험 성적에 따라 과거에 특혜를 줌.
5월 11일
• 정업원(淨業院) 여승들이 금강산의 유점사(楡岾寺)에 가려고 몰려다니자 유생들이 정업원 혁파를 청함.
5월 15일
• 김귀영(金貴榮) · 유희춘(柳希春) 등에게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을 짓도록 함.
5월 24일
• 향약을 등서(謄書)하여 오부(五部)와 외방 각 고을에 알리고 한성부 등이 관장하도록 함.
6월 7일
• 오랜 가뭄 때문에 창덕궁 춘당대에서 3일 동안 비를 빌고,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며, 피고(皮鼓)를 치지 말고 저자를 옮기고 도랑을 치도록 함.
6월 24일
• 비가 내렸으니 남대문을 열고 숙정문을 닫는 등 정상대로 함.
9월 27일
• 근정전에서 별시문과 15명을 뽑음.
11월 1일
• 이성중(李誠中) · 김성일(金誠一) 등을 사가독서(賜暇讀書)하게 함.
11월 26일
• 경상감사가 직지사에 소장되어 있던 《발명강목(發明綱目)》판본 4,182개를 칠하고 장철(粧鐵)하여 올려 보냄.
11월 28일
• 유잠(柳潛)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2월 3일
• 《발명강목》을 《훈의(訓義)》에 의해 교정하도록 함.
12월 13일
• 황당인(荒唐人)을 금단하고 잡아내게 하는 절목으로 방(坊)마다 십가작통제(十家作統制)를 실시함.
12월 18일
• 임금이 의성왕대비(懿聖王大妃, 인종비)가 편치않아 창덕궁에 나아가 사소(四所)에 숙소를 정함.
이해
• 광평대군 이여(李璵) 신도비, 영순군 이부(李溥) 신도비, 정간공 이명(李蓂) 신도비를 건립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