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31년, 무술년(戊戌年), 1598년

조선 선조 31년, 무술년(戊戌年), 1598년

1월 12일

• 임금이 홍제원에서 명의 감군어사(監軍御使) 진효(陳效)를 영위(迎慰)함.

1월 14일

• 호구법(戶口法)과 요패법(腰牌法)을 조목(條目)을 세워 거행하도록 함.

1월 19일

• 임금이 숭례문 밖에서 고책(高策) 중군(中軍)을 영접함.

1월 26일

• 군적(軍籍)을 정리하게 함.

이달

• 제독 마귀(麻貴)가 경주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돌아옴.

2월 2일

• 경창(京倉)의 미두(米豆)를 계속 대기 위하여 평안 · 황해도에서 해운(海運)해 오도록 함.

2월 9일

• 호조에서 한성에 머물러 있는 명군(明軍)의 식량 수급대책을 정함. 재경명군 숫자 3만여 명, 한 달간 지공할 쌀 1만 8천석, 현재 남아 있는 대미는 3,800여 석. 배천 · 연안 · 해주 등 관창에 저장된 대미와 전세(田稅) 미두를 우선 배편으로 운송함.

2월 12일

• 한성부판윤 유자신(柳自新)이 의관인(衣冠人)을 구타하여 체직됨.

2월 13일

• 이충원(李忠元)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2월 16일

• 임금이 양호(楊鎬)를 맞이하기 위해 동작강(銅雀江)에 갔으나, 양호가 소복(素服) 차림이라 하여 들어오지 않음.

2월 18일

• 제독 마귀(麻貴)가 한성에 군량이 없다는 이유로 전주와 예천에 군사를 보내어 먹으면서 방수(防守)하게 함.

2월 19일

• 남대문의 대종을 도성의 남쪽 높은 언덕으로 옮겨 달고 인정 · 파루를 치게 함.

2월 21일

• 해주(海州)에서 발송한 양선(糧船) 5척이 용산강에 정박함.

2월 28일

• 건원릉(健元陵)과 현릉(顯陵)에 불이 남.

3월 3일

• 김수(金睟)가 1597년 5월부터 1598년 2월까지 조선에서 명군(明軍)에게 지출된 쌀과 콩의 양이 19만 6,928석이라고 아룀.

• 임금이 명의 경리(經理)에게 독약 만드는 법을 전수받도록 하였으나 끝내 전수하지 않음.

3월 6일

• 윤국형(尹國馨)을 한성부우윤으로 삼음.

3월 15일

• 부족한 군량미의 수급대책으로 양서(兩西) · 명(明) · 호남의 쌀을 실어오도록 함. 현재 용산창에 대미 400여 석, 소미 6천여 석, 콩 3,900석이 있음.

3월 17일

• 임금이 홍제원에서 명의 군문 형개(邢玠)를 전별함.

• 세작(細作, 간첩)을 잡기 위해 한성 안팎과 성문을 출입하는 사람을 상세히 사찰하도록 함.

3월 29일

• 경리 양호(楊鎬)가 영남 · 호남으로 군사를 나누어 보낼 방안을 제시함.

4월 6일

• 임금이 동작동 백사장에서 유격 진인(陳寅)과 같이 습진(習陣)을 구경함.

• 용산창(龍山倉)의 미두(米豆) 1,180여 석을 배에 싣고 충주로 향함.

4월 17일

• 왜적들이 세작(細作, 간첩)을 보낼까 염려스러워 동대문과 남대문에 약간의 화전(火箭)을 배치하고 주야로 수직하면서 잡인의 출입을 금하도록 함.

4월 30일

• 당상관 정3품 실직(實職) 이상에게 그들의 산료(散料)에서 적당량을 국용(國用)에 보태도록 함.

5월 8일

• 군량이 곳곳마다 부족한 실정에서 경기 인근 고을 · 황해 · 강원의 비축미와 좁쌀 등을 서울로 수송하게 함.

• 명(明)의 경리가 성균관에 가서 대성전의 위패를 보고 명에서는 ‘지성선사공자지위(至聖先師孔子之位)’라 썼는데 조선에서는 ‘문선왕(文宣王)’이라 썼다고 함.

5월 14일

• 임금이 관왕묘(關王廟)에 친제(親祭)함. 유격이 뜰에서 광대놀이를 베풀고 임금을 맞이하여 함께 관람함.

5월 16일

• 임금이 하루에 두 끼니로 하고 공상하는 쌀을 절반으로 진상하도록 함. 내탕고(內帑庫)의 쌀 50석을 호조로 하여금 받아가게 함.

5월 17일

• 가뭄이 심하여 기우제를 지냄.

5월 18일

• 보리쌀을 섞어 쓰는 일을 제도(諸道)로 하여금 일체 준행하도록 함.

5월 27일

• 임금이 제독 마귀(麻貴)를 전송하기 위해 한강 막차(幕次)에 나아감.

• 경리 양호(楊鎬)가 한강의 별영에 앉아서 제독과 유격 허국위(許國威) 휘하의 군병과 함께 열병함. 압구정까지 유람함.

6월 1일

• 명이 왜적과 강화하는 것을 경계하게 함.

• 제독 유정(劉綎)이 한성으로 들어오니 모화관에서 맞이함.

6월 10일

• 기청제(祈晴祭)를 다시 거행하도록 청함.

6월 13일

• 중외의 군량 사정이 절박함을 먼저 명군(明軍)에게 살피게 함.

6월 17일

• 명의 경리대인(經理大人) · 포정(布政) · 안찰(按察)에게 연회를 베풀되, 대신들은 동참하지 말게 함.

6월 24일

• 문묘에 명군(明軍) 20여 명이 난입하여 위판을 철거하니 위안례(慰安禮)를 거행하도록 함.

6월 26일

• 임금이 동작강(銅雀江) 언덕에서 500여 척을 거느리고 전라도로 가는 도독 진인(陳璘)을 전별함.

6월 29일

• 주사종사관(舟師從事官) 권형(權炯)이 전 판관 임대춘(林大春)과 배 105척을 거느리고, 천진(天津)의 쌀 7,400여 석과 산동(山東)의 좁쌀 1만 7,930여 석, 황두 4,650여 석을 싣고 경강(京江)에 도착함.

• 김수령(金壽齡) · 임운수(林雲水) · 최덕룡(崔德龍) 등이 여러 상인들에게 쌀 20석과 좁쌀 16석을 모아 호조에 보냄.

7월 2일

• 명나라에서 온 미두(米豆)로 백관 이하에게 한 차례 나누어 주도록 함.

7월 5일

• 제독 유정(劉綎)이 군중의 화살에 바르는 독약 제조 방법을 은밀히 전수해 익히도록 함.

7월 11일

• 양호(楊鎬)가 파직되어 돌아가니, 임금이 홍제원에서 전송함. 만세덕(萬世德)이 대신 옴.

7월 12일

• 임금이 동작강에서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제독 유정(劉綎)을 전송함.

7월 13일

• 조경(趙儆)을 한성부우윤으로 삼음.

7월 15일

• 남대문 밖에서 중국 복장으로 변장한 왜인을 붙잡음.

7월 23일

• 임금이 모화관에서 부총 오유충(吳惟忠)을 맞이하여 다례와 주례를 행함.

7월 25일

• 훈련도감의 포수와 살수 12명을 뽑아 허국위(許國威) 유격의 군중에서 무예를 익히게 함.

7월 27일

• 사헌부에서 한성부판윤 조경(趙儆)이 훈련도감 일을 관장하여 한 명의 군사도 모집하지 못하고 제반 군무도 해이해지고 있어 체직하기를 청함.

8월 1일

• 김수(金睟)가 명군(明軍)의 약탈 · 강간 등 민폐가 크다고 치계(馳啓)함.

8월 2일

• 임금이 모화관에서 제독 동일원(童一元)을 접견함.

8월 3일

• 임금이 홍제원에서 군문 형개(邢玠)를 맞아 위로함.

8월 5일

• 제독 마귀(麻貴)가 군사를 이끌고 한성으로 돌아옴.

8월 9일

• 임금이 명의 총병 조승훈(祖承訓)의 처소에 거둥하여 남행길을 전송함.

8월 10일

• 임금이 명의 유격 팽신고(彭信古)를 태평관에서 접견함.

8월 13일

• 파루 후에 임금이 동작강(銅雀江)에 거둥하여 제독 유정(劉綎)을 맞이함.

8월 18일

• 임금이 남문(南門) 밖 삼기리(三岐里)에서 마귀(麻貴) · 동일원(童一元) · 유정(劉綎)을 전송함.

8월 19일

• 서로(西路) 양선(粮船)이 6월 25일 이후로 경강에 처음 도착한 숫자가 120여 척이 됨.

8월 22일

• 임금이 동작강에서 참정(參政) 왕사기(王士琦)를 전별함.

• 왜군이 순천 · 서생포에서 철수를 시작함.

9월 1일

• 경기와 충청도의 각 참(站)에 인부를 분정(分定)하여 군량을 용산창으로부터 용궁(龍宮)과 상주(尙州)로 운반하게 함.

9월 11일

• 임금이 동작강에서 안찰사 왕사기(王士琦)를 맞이함.

9월 12일

• 임금이 홍제원에서 급사(給事) 서관란(徐觀瀾)을 맞이함.

9월 18일

• 임금이 남대문 밖 삼거리에서 포정(布政) 양조령(梁祖齡)을 전송함.

9월 20일

• 조 · 명연합군이 수륙으로 울산 도산성(島山城)과 순천의 왜군을 협공함.

10월 1일

• 명나라 경리(経理) 만세덕(萬世德)이 서울에 들어옴.

10월 12일

• 동로의 명군(明軍)은 24만명, 조선군(朝鮮軍)은 5,514명, 중로의 명군은 26만 800명, 조선군은 2,215명, 서로의 명군은 21만 900명, 조선군은 5,928명이며, 수로(水路)의 명군은 19만 400명, 조선군은 7,328명으로 모두 10여 만 명이었음.

10월 20일

• 경기 김포 지역 관학(館學)의 전답 100여 섬지기의 경작 여부를 조사하여 선비를 양성하도록 함.

10월 21일

• 이항복(李恒福)을 진주사(陳奏使)로 삼아 명나라에서 양호(楊鎬)의 무리를 변호하게 함.

10월 25일

• 홍여순(洪汝淳)을 한성부판윤으로 삼음.

11월 19일

• 이순신(李舜臣)이 노량(露梁)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전사함. 일본군 전원 철수함.

11월 25일

• 임금이 명의 만세덕(萬世德)을 모화관에서 맞이함.

12월 6일

• 유성룡(柳成龍)이 북인(北人)의 탄핵으로 삭탈관작됨.

이해

• 명의 유격 진린(陳璘)이 남관왕묘(南關王廟, 중구 도동 1가 68번지)를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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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辛丑年), 16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