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초월

박초월

[ 朴初月 ]

요약 성악가(판소리). 판소리명창. 호는 미산(眉山). 본명은 박삼순(朴三順). 전남 순천(順天) 또는 승주군 주암면 봉암리 출생.
출생 - 사망 1913 (또는 1917)년 ~ 1983년
박초월

12세 때 아버지를 따라 남원권번의 소리선생 김정문(金正文)의 문하에서 3년 동안 춘향가·흥보가·심청가(沈淸歌)의 토막소리를 배운 후 전주로 시집갔다. 17세 때인 1930년 전주에서 열린 전국명창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후 여러 음반회사와 계약을 맺고 흥보가·심청가·춘향가 등을 취입하였다.

상경하여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研究會)에 들어가 송만갑(宋萬甲)에게 춘향가·흥보가·심청가를 배웠고, 임방울(林芳蔚)·박귀희(朴貴姬)와 함께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의 일원으로 창극활동에 참여하여 여류명창으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흥보가와 심청가를 취입하였다.

1934~1945년 국본정엽(國本正葉)·임유앵·정원섭·한성준과 함께 가야금병창·"개고리타령"·"고왕금래"(古往今來) 등 많은 민요단가 등을 방송하기 위해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에 출연했다. 그녀가 취입한 남도단가(南道短歌)·남도민요·"동풍가"(東風歌)·"륙자백이"(육자배기) 등은 폴리돌음반에 전한다.

1936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의 직속단체로 창극좌(唱劇座)가 창단됐을 때 김연수·오태석·임방울 등과 함께 창극활동을 전개하였다. 1937년 대동가극단(大東歌劇團)에서 이화중선과 소리를 겨루며 명성을 날렸다. 1939년 동일창극단으로 옮겨 박귀희·정광수 등과 전국 순회공연에 출연하였다. 1936년 8월 29일 수해구제자선구악대회 때 금일봉을 의연했고, 1940년 3월 18일 한해구제명창대회 때 출연했다. 『新世紀』(1939) 1권 7호 소재 "장안명기(長安名妓) 인물론(人物論)"에 소개되었다.

일제강점기 그녀가 취입한 단가 "천하태평"은 오케음반에 전한다. 1939년 하창춘이 창단한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 주최 "일목장군"(一目將軍) 공연 때 그는 안기옥·오태석·임방울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1940년 국극동지사(國劇同志社)를 창립하였다. 1941년 4월 창설된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 소속 조선악부조선가무단과 함께 창설된 조선음악단(朝鮮音樂團)의 단장 박헌봉 아래 이충선·김계선·김봉업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43년 9월 제일극장에서 이운방(李雲芳)의 창작 창극 "남강의 풍운"으로 동일창극단의 창단공연을 가졌을 때 안기옥·오태석·임방울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광복 후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의 창극단에서 오태석·백점봉·조상선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45년 여성국악동호회(女性國樂同好會)를 조직하여 이사장과 대한민국예술원 이사를 역임했다. 여성국극단체를 만들어 활동했고, 1955년 현재의 국악예술학교(國樂藝術學校)의 모체인 한국민속예술학원(韓國民俗藝術學院)을 박귀희(朴貴姬)와 함께 설립하였다.

1958년 대한국악원의 직속단체로 출범한 시범국극단(示範國劇團)의 춘향전 공연 때 춘향모 역을 맡은 그녀는 장영찬(이도령)·박후성(방자)·김득수(후배사령 및 집장사령)·남해성(춘향)·박봉선(향단)·안태식(사또)·김효순(초동)과 함께 출연하였다. 1960년대 설립된 국악예술학원(國樂藝術學院)에서 박헌봉·김소희·박귀희 등과 함께 후진양성에 전력했다. 이 학원은 국악예술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1960년대 킹스타레코드에 "새타령"·"보렴"·"진도아리랑" 등 남도소리 10여 곡을 취입했다. 1962년 창단된 국립국극단 주최 제1회 창단기념 창극 대춘향전공연 때 그녀는 단장인 김연수 및 단원인 김소희·박귀희·강장원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1962년 초대 국악협회 이사장 및 판소리보존협회 이사장 그리고 서울국악예술단의 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5호 판소리 수궁가(水宮歌)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그녀의 심청가를 조통달·남해성·김수연·전정민에게 전수시켰다. 1966년 국립창극단(國立唱劇團)에 입단했고,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후 박초월무형문화재전수소(朴初月無形文化財傳授所)를 설립하여 제자를 양성했다. 1967년엔 서독 베를린에서 열린 현대음악제 때 수궁가를 2시간 30분 완창하였다. 1970년 그녀가 부른 판소리 심청가를 김기수(金琪洙)가 5선보로 채보하여 『한국음악』 제6집으로 출간하였다.

1973년 11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수궁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됐고, 제자로는 조순애·한농선·성우향·남해성·조통달·전정민 등이 있다. 1976년 10월 12일 제2회 국제현대음악제(國際現代音樂祭)에서 판소리 수궁가를 완창했다. 11월 25일 제6회 판소리 유파발표회 때 출연했으며, 12월 문화재관리국과 문화재보호협회가 공동 제작한 『한국의 음악』에서 정광수와 함께 판소리 수궁가를 취입하였다.

1977년 오정숙·박봉술·성우향 등과 함께 한국브리태니커사의 뿌리깊은나무 판소리감상회 때를 비롯해 여러 공연에 출연하였다. 1979년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다. 지구레코드사가 제작한 LP음반 5매의 『창극대춘향전』 취입 때 김연수·박녹주·박귀희·김여란·김소희와 함께 출연하였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375~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