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선

이충선

[ 李忠善 ]

요약 대금(大笒)·피리 연주가. 무악(巫樂) 명인. 경기도 광주(廣州) 출생. 고재덕(高載德)의 제자. 이재규(李在圭)에게 사사. 빅타레코드사 전속악사(1937).
출생 - 사망 1901년 ~ 1990 (또는 1989)년
이충선

23세 때 방용현(方龍鉉)에게 대금 삼현 및 시나위를 배웠고, 24세 때 양경원으로부터 피리 삼현 및 시나위를 배웠다. 35세 무렵 상경하여 악사로 있으면서 이재규로부터 피리 줄풍류 전바탕을 배웠다. 36세 때 정악원(正樂院)에서 민완식(閔完植)으로부터 양금 풍류 전바탕을 배웠다. 일제강점기 스승과 함께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대중에게 이름이 알려졌다. 일제 말기 심상건·김계선·임유앵 등과 함께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의 조선악부 소속 조선음악단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34~1944년 고준성(高俊成)·권경란(權瓊蘭)·김난수(金蘭秀) 등과 함께 가곡(歌曲)·가요(歌謠)·"강원도 긴아리랑"·"개성난봉가"를 포함한 30여 곡의 민요 및 취타·"타령"·퉁소독주·평시조 등 여러 갈래의 음악을 방송하기 위해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에 출연하였다. 젓대로 고재덕·정금도·함동정월과 함께 취입한 "관산융마"(關山戎馬)·시조는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하고, 해금으로 반주한 김옥산·이산옥·최순경의 노래는 오케음반에 전한다. 그가 젓대·피리로 취입한 "방아타령"·속곡·"신 아리랑" 등은 태평음반에 전한다.

1941년 4월 창설된 조선음악협회 소속 조선악부의 조선가무단과 함께 창설된 조선음악단(朝鮮音樂團)의 단장 박헌봉(朴憲鳳) 아래 김계선·김봉업·임유앵·박초월·장채선·이창순·경부용·최일송·김송죽과 함께 활동하였다. 해방 후 서울 무악(巫樂)의 피리·대금·해금·단소·장구를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는 만능 연주자로 알려졌다.

1947년 12월에 창단된 전속조선음악회(專屬朝鮮音樂會) 민속악 분야의 단원으로 문교부 편수국의 장사훈 및 서울중앙방송국의 이혜구·이계원·이덕근·송영호의 도움으로 김준현·이덕환·김성진 등과 방송활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 성금연(成錦鳶)과 심상건(沈相健)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웠으며, 1960년대 초 국립국악원 악사로 근무하면서 대금산조피리산조를 짰다. 가야금산조(伽倻琴散調)를 모방하여 이충선류(李忠善流) 대금산조(大笒散調)를 창시하였다.

1959년부터 1967년까지 국악사양성소(國樂士養成所)의 대금산조·피리산조 강사로 후진을 양성했다. 1969년 김기수(金琪洙)가 채보한 『한국음악』 제3집에 전하는 그의 피리산조가 5선보로 채보됐다. 그의 대금산조는 편재준류·이충선류·한범수류·한주환류와 함께 5선보로 채보되었다.

1973년 신세계레코드사가 제작한 LP음반 3매(민-4001~4003)의 『한국민요특선집』을 이은주묵계월이 취입할 때 피리를 맡은 그는 허상복(젓대)·성금련(가야고)·지영희(해금)·서공철(아쟁)·이정업(장구)과 함께 반주를 맡았다.

1973년 11월 11일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49호 송파산대(松坡山臺)놀이의 장고·대금·피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그의 피리 가락은 양아들 김찬섭에게 전승되었다. 1978년 4월 26일 「공간전통음악의 밤」에서 이생강(대금)·한갑득(거문고)·이용배(장고)와 함께 시나위합주를 연주하였다. 1969년 제1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개인상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720~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