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녹주

박녹주

[ 朴綠珠 ]

요약 성악가(판소리). 판소리명창. 중요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 제5호 판소리(홍보가) 예능보유자. 경상북도 선산(善山) 출생. 본명은 박명이(朴命伊). 예명은 박녹주. 호는 춘미(春眉).
출생 - 사망 1906년 ~ 1979년
박녹주

1905년 2월 15일 박수무당 박재보(朴在甫)의 3남 2녀 중 맏딸로 태어난 그녀는 1916년(12세) 동편제 판소리 대가 박기홍(朴基洪)에게서 춘향가단가를 배웠다.

1918년(14세) 김창환(金昌煥)에게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를 배웠으며, 1921년(17세) 원산(元山) 명창대회에서 만난 남백우와 혼인하였다.

1922년(18세) 상경해 한남권번(漢南券番)에 기적(妓籍)을 두고 송만갑(宋萬甲)의 문하에서 단가와 춘향가를 배웠다. 그녀의 특장은 흥보가와 춘향가였다. 1928년 3월 25일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 주최 신춘남녀명창대회 때, 1929년 1월 12일 조선음악협회 주최 경인연합명창음악연주회 때, 1930년 9월 15일 팔도명창대회 때, 1931년 9월 21~23일 제2회 팔도명창대회 때, 1931년 3월 30~31일 조선음률협회(朝鮮音律協會)의 제2회 공연 때 출연했다. 1931년 9월 27일 조선음률협회 주최 삼인공연음악회 때 박월정·김초향과 함께 출연하여 단가·춘향전 등을 공연했으며, 1931년 12월 22일 조선음률협회 주최 박월정 여사 고향방문음악회 때, 1932년 10월 3일 「조선음악의 밤」 때 출연하였다.

1934년 5월 11일 조선음악연구회(朝鮮音樂研究會)의 발기총회 때 그녀는 이동백·강태홍·김동강·김용승·김종기·김창룡·김채련·송만갑·심상건·오태석·정정렬·한성준, 이상의 발기인과 함께 참여하여 1934년 4월 24일에 설립한 조선성악원(朝鮮聲樂院)을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研究會)로 개칭하여 다시 출범시켰다.

1936년 2월 조선성악연구회의 직속단체로 창극좌(唱劇座)가 창단됐을 때 강태홍·김세준·김연수 등과 함께 창극활동을 전개했다. 1936년 4월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좌 창립기념공연으로 동양극장의 무대에 올린 창극 흥보전 공연 때 흥보처 역을 맡은 그녀는 오태석(흥보)·정남희(놀보)·임소향(놀보처)·조상선(마당쇠)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1936년 9월 12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 가극(歌劇) 춘향전 공연 때, 1936년 10월 28일 가극 흥부전 공연 때, 1936년 12월 15~20일 가극 심청전 공연 때, 1937년 2월 26~3월 2일 가극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 공연 때, 1937년 6월 21~25일 가극 "편시춘"(片時春) 때, 1938년 3월 13~17일 가극 토끼타령 공연 때, 1938년 8월 8일 창극(唱劇) 옹고집전(雍固執傳) 때, 1938년 10월 4~5일 새 창극 농촌야화(農村夜話) 공연 때, 1939년 1월 29일 창극 춘향전 때, 그리고 1939년 10월 7~16일 창극 춘향전 때, 1939년 10월 7~11일 창극 춘향전·심청전을 공연할 때 출연하였다.

1938년 5월 23일 조선성악연구회 제5회 정기총회 때 이사로 선임됐고, 1939년 5월 22일 조선성악연구회 제6회 정기총회 때 이사로 당선되었다. 1934년 3월 3일 조선정악대회(朝鮮正樂大會) 때, 1935년 2월 5일 조선가극대회(朝鮮歌劇大會) 때, 1936년 7월 15~16일 여류명창대회 때, 1936년 8월 28~29일 수해구제구악대회 때, 1936년 7월 15~16일 여류명창대회 때, 1937년 6월 11일 춘향전 전편(全篇)을 취입할 때, 1937년 7월 2~3일 조선성악연구회의 명창대회 때, 1938년 1월 11일 김석구독창회 때, 1938년 3월 12~13일 여류명창대회 때, 1938년 4월 27~28일 전조선향토연예대회 중 춘향전과 심청전 공연 때, 1938년 4월 27일 부민관에서 열린 판소리대회의 춘향전과 심청전 전창(全唱) 때, 1938년 5월 4~10일 전조선향토연예대회 중 조선성악연구회의 판소리대회 때, 1938년 5월 24일 명창의 밤 때, 1939년 5월 21일 이동백은퇴공연(李東伯隱退公演)의 지방순회공연 때, 1940년 1월 15~16일 조선음악연구회의 일류명창대회 때, 1940년 3월 16~17일 한해구제명창대회 때 출연했다. 1940년 12월 24일 제일극장에서 박석기가 창단한 화랑창극단(花郞唱劇團)의 창단공연 때 조상선·한주환·김여란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20세 때인 1924년 콜럼비아사의 초청으로 처음 음반에 취입한 이래 1926년에는 오케사와 1927년에는 빅타사와 함께 수많은 음반에 취입하였다. 1928년 콜럼비아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맺었고, 1929년 11월 13일 일본 콜럼비아 축음기회사의 제2회 취입 때 복혜숙·김영환·김초향 등과 함께 취입했다. 여러 레코드사에서 취입한 음반의 수는 콜럼비아(17매)·빅타(16매)·시에론(12매)·폴리돌(6매)·오케(4매)·일동(4매)·태평(2매), 모두 61매이다. 음반에 취입한 단가 중 5회로 가장 많이 취입한 "대관강산"(大觀江山)을 비롯해 "강산풍월"(江山風月)·"강산유람"(江山遊覽)·"소상팔경"(瀟湘八景) 등 18종목이나 된다.

그녀가 취입한 "꼿사거리," 단가 "강산유람"·"소상팔경"을 비롯한 여러 곡은 일축(日蓄)제비표 조선레코드에 전하고, 김영환·김창환·하농주 등 함께 취입한 "고당상"(高堂上)·"군로사령"을 포함한 수많은 곡을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한다. 이 노래의 일부는 콜럼비아관현악단 반주로 취입되었다. 그녀가 취입한 "개고리타령"·"광한루 경개"(廣寒樓景槪)·"기생점고" 등의 여러 노래는 일본 빅타음반에 전하고, "달거리"·"박타령"·"사랑가" 등의 노래는 폴리돌음반에 전하며, 임방울의 반주로 취입한 "고고천변"(皐皐天邊)·"긴사랑가" 등의 여러 노래는 시에론음반에 전한다. 김연수·김옥련·정남희 등과 함께 오케고악단반주로 취입한 "강산풍월"(江山風月)·"곽씨부인 해산" 등 수십 곡의 노래는 오케음반에 전한다.

그녀가 취입한 남도잡가(南道雜歌)·단가 "대관강산"·"범피중류" 등의 여러 노래는 태평음반에 전하고, 그녀가 취입한 춘향전의 "오리정 이별"·"춘향가 이별"은 군소회사음반에 전한다. 일제강점기 취입한 SP음반으로 Columbia 40065AB(심청전)·C40076A(만고강산)·B(춘향집경치)를 포함해 18매가 있고, Okeh1542A(운담풍경)·B(흥보전)을 비롯한 15매가 있으며, Regal 105A(귀불귀) 등 7매, Victor KJ-1111(춘향전전집) 등이 있다.

1930년대 경성방송국에 출연한 김소희·박녹주·정정렬·이화중선·임방울·한성준

1930년대 경성방송국에 출연한 김소희·박녹주·정정렬·이화중선·임방울·한성준

1928~1945년 국본정엽(國本正葉)·대원원섭(大原元燮)·심상건(沈相健) 등과 함께 "강상에 둥둥"·"개고리타령"을 포함한 민요와 단가 그리고 판소리의 여러 눈대목을 방송하기 위해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에 출연하여 박녹주는 심청가·적벽가·춘향가·흥보가의 눈대목 방송에 모두 출연했다. 눈대목의 방송 때에는 언제나 "강상풍월"·"대관강산"·"백발가"·"소상팔경"·"어화청춘"·"운담풍경"·"죽장망혜"·"천하태평"·"초한가" 등의 단가를 불렀다.

1930년 2월 19일부터 1941년 1월 8일까지 춘향가의 눈대목을 28회, 1932년부터 1943년까지 흥보가를 25회, 1931년부터 1938년까지 심청가를 18회, 적벽가(4회)·창극조(13회)를 방송했다. 1930년부터 1940년까지 방송한 단가 중 가장 자주 방송한 "운담풍경"(雲淡風輕: 8회)을 비롯해 "조조사향가"(曺操思鄕歌: 5회)·"소상팔경"(瀟湘八景: 5회)·"죽장망혜"(竹杖芒鞋: 5회)·"강상풍월"(江上風月: 3회)·"만고강산"(萬古江山: 3회)·"천하태평"(天下泰平: 3회) 등이 있다.

1945년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의 창극단에서 오태석·백점봉·조상선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48년 9월 1일 여성국악동호회(女性國樂同好會)가 출범했을 때 회장을 맡은 그녀는 부회장은 김연수와 임유앵, 총무는 조유색, 그리고 단원은 박귀희·김소희·한영숙·김농주·성추월·신숙과 함께 그해 10월 창단공연으로 창작 창극 "옥중화"(獄中花)를 시공관에서 공연했고, 1949년 2월 김아부(金亞夫) 작의 "햇님과 달님"을 시공관에서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1950년대 중반에 설립된 여성국극단체의 하나인 보랑국악단 대표를 역임했다. 1954년 5월 국극사 주최 "열녀화"(烈女花) 공연 때 출연하였다.

1960년 3월 5일 국악예술학교(國樂藝術學校)가 출범했을 때 판소리교사였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흥보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1976년 12월 문화재관리국과 문화재보호협회가 공동 제작한 『한국의 음악』에 판소리 흥보가를 취입하였다. 지구레코드사가 제작한 LP음반 5매의 『창극대춘향전』 취입 때 김연수·박귀희·김여란·박초월·김소희와 함께 출연하였다. 정정렬(1876~1938)이 작창한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을 전승하였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329~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