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판소리

요약 우리나라 전통성악의 한 갈래. 일명 타령(打令)·잡가(雜歌)·판창(板唱)·연창(演唱)·창가(倡歌)·판노름·광대소리·창극조(唱劇調)·극가(劇歌)·창조(唱調)·구극(舊劇)·창극가(唱劇歌)·창악(唱樂)·본사가(本事歌)·남도창(南道唱).

한 명의 창자(唱者)가 한 고수(鼓手)의 북 장단에 맞추어 서사적(敍事的) 이야기를 소리(창·노래)·아니리(말)·발림(몸짓)으로 엮어 나가는 극적인 노래가 판소리다.

가곡(歌曲)·범패(梵唄)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 전통성악의 한 갈래인 판소리는 조선후기 민간음악광대(廣大)들이 발전시킨 높은 예술성을 지닌 성악갈래이다. 소리광대가 고수의 북반주에 맞추어 춘향가·심청가 등의 이야기를 혼자서 아니리와 발림을 섞어가며 노래 부르는 독특한 형태의 성악갈래가 판소리이다. 이 판소리의 연주형태는 후에 연극적인 요소를 가미한 서양 오페라 양식의 창극(唱劇)과 구분된다.

〈어의(語義)〉 판소리라는 말은 '판'과 '소리'의 복합어이다. '판'이라는 말은 쓰이는 경우에 따라서 여러 의미가 있다. 노름판·씨름판·첫판·끝판·난장판·장판·소리판 등의 낱말에서 보듯이 그 말은 첫째로 사람이 모이는 곳을 뜻하고, 둘째로 어느 장면 또는 국면을 가리키기도 하며, 셋째 연주 장소 곧 무대, 이상의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소리'라는 말은 남도소리·서도소리·광대소리·경기소리 등의 사례에 나타났듯이 민간음악 중 성악곡을 의미하는 포괄적 용어이다. 이 말은 조선후기 식자(識者)들이 발전시킨 가곡·가사·시조 등의 이른바 정가(正歌)의 대칭어로 쓰였다. 대체로 판소리란 사람들이 모인 놀이판에서 불리는 노래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무난하다.

한편 '판'을 '판에 박힌다'란 뜻으로 해석하면, 판소리란 판에 박은 듯이 정해놓은 일정한 틀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로 풀이될 수도 있다.

〈유래〉 판소리는 조선후기 민간음악의 여러 갈래처럼 근래까지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전승된 음악이므로, 문헌을 통한 판소리의 역사적 유래는 18세기 중엽 이상을 거슬러 오르기가 어렵다. 다만 오늘날과 비슷한 연주형태가 영조(1724~1776) 초기 무렵에 형성됐으리라고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판소리의 초기 형성단계에서 크게 영향을 준 음악은 무가(巫歌) 중 이야기를 길게 소리로 엮어가는 서사무가(敍事巫歌)였으리라고 보고 있다. 현행 서사무가의 음악적 연주형태, 그리고 조선후기 무당과 광대의 사회 신분적 관계 등은 판소리의 기원에 대한 강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판소리의 본격적인 출현 이전에 굿판에서 무당의 조무(助巫)역할을 담당했던 광대가 연주한 음악은 오늘날의 배뱅이굿처럼 예술적인 면보다는 흥미 본위로 단순하게 엮어진 노래였으리라고 추정된다. 서사무가의 연주형태를 못 벗어난 흥미 본위의 초기 판소리가 18세기 이후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소리광대들에 의해 음악적으로 세련된 높은 차원의 공연예술로 발전시켰으리라고 생각되고 있다.

〈연혁(沿革)〉 판소리가 무가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고 보는 무가기원설(巫歌起源說)의 근거는 이렇다. 첫째 판소리는 시나위조(調)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고, 둘째 판소리의 가락은 무가의 가락과 같다. 셋째 판소리의 연창양식이 무가와 같고, 넷째 판소리의 북반주가 무가의 반주와 같다. 다섯째 고수의 추임새도 무가와 같다는 것이다.

판소리의 형성기는 영조 때까지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하한담(河漢潭)·최선달(崔先達)·우춘대(禹春大) 등이 등장하여 판소리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판소리의 전성기는 정조(1776~1800)로부터 고종(1863~1907) 때까지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8명창이 전후 두 번이나 나왔다.

정조 때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戲), 순조(1800~1834) 때 신자하(申紫霞)의 「관극시」(觀劇詩), 1852(철종 3) 윤달선(尹達善)의 「광한루악부」(廣寒樓樂府), 신재효(申在孝)의 "광대가"(廣大歌)가 있다. 고문서(古文書)로 1825년(순조 25) 「갑신완문」(甲申完文)과 1827년(순조 27) 「정해소지」(丁亥所志)가 있다. 이 문서에서 광대들의 전국적인 조직과 활동상황을 엿볼 수 있다.

판소리의 쇠잔기는 고종 말 대한제국(1897~1910) 시절 일본을 비롯해 열강의 침략으로 정국이 어수선할 무렵이다. 이때 이인직(李人稙)이 일본에서 들여온 신연극(新演劇)의 영향으로 판소리를 그 본질에서 벗어난 창극(唱劇)으로 변질시켰다.

〈역사적 개관〉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를 갖춘 판소리의 유래는 숙종(1674~1720) 무렵인 18세기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 추정의 근거는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의 『만화집』(晩華集)에 전하는 소리광대의 춘향가를 한시로 읊은 200구이다.

판소리의 역사와 관련된 문헌으로는 유진한의 『만화집』 외 송만재의 「관우희」, 신위(申緯) 즉 신자하(申紫霞)의 「관극시」, 신재효의 『판소리사설집』 및 "광대가," 윤달선의 「광한루악부」, 그리고 「팔도재인등장」(八道才人等狀) 등이 있다.

서유구(徐有榘)의 사촌 처남 송만재의 「관우희」에 의하면, 19세기에 이미 춘향가·심청가·박타령(흥부가)·토끼타령(수궁가)·화용도(적벽가)·배비장전·옹고집전·변강쇠타령·장끼타령·무숙이타령·가짜신선타령·강릉매화전, 이상 판소리 열두마당이 공연됐다. 이 판소리의 열두마당 중 춘향가·퇴별가(수궁가)·심청가·박흥보가·적벽가·변강쇠가, 이상 여섯마당을 신재효가 기록으로 남겼다.

판소리의 초기 형성은 18세기에 이루어져, 19세기 초반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19세기 말기까지 유명한 명창들이 등장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20세 초에 이르러 판소리는 새로운 형태의 창극으로 전승되다가, 1960년대부터 다시 옛 형태의 판소리가 복원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세기 말기 판소리명창으로 하은담 또는 하한담·최선달·우춘대 등이 있다. 19세기 전반기에는 권삼득(權三得)·모흥갑(牟興甲)·송흥록(宋興祿) 등의 명창들이 판소리의 예술성을 한 차원 높게 발전시켰다. 이 당시에 판소리의 열두마당이 형성됐다.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신재효가 열두마당 중 춘향가·심청가·퇴별가(수궁가)·적벽가·박흥보가·변강쇠타령, 이상 여섯마당의 사설을 문자로 기록했다. 또한 신재효는 "광대가"에서 당시에 유명한 송흥록·모흥갑·권사인(權士仁)·신만엽(申萬葉)·황해청(黃海淸)·고수관(高壽寬)·김계철(金啓喆)·송광록(宋光祿)·주덕기(朱德基) 명창을 중국 당송대(唐宋代) 문장가(文章家)와 비교했다. 또한 그의 "광대가"에서 소리광대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네 가지의 기본 요소 즉 인물(人物)·사설(辭說)·득음(得音)·너름새를 언급함으로써 판소리이론 정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고종 당시 활동한 박유전(朴裕全)·이날치(李捺致)·김세종(金世宗)·정창업(丁昌業)·박만순(朴萬順) 등의 명창 및 비갑이 곧 양반광대(兩班廣大)의 등장과 더불어 판소리의 사설에 한문투의 세련된 미사여구(美辭麗句)들이 삽입됐다. 또한 여러 명창들의 음악적 특징을 담은 더늠이 형성됐다.

19세기 말기에 이르면서 여류명창 진채선(陳彩仙)의 등장으로 인하여 남성 위주의 판소리전통에 새로운 물줄기가 형성됐다. 당시 대원군(大院君 1820~1898)의 후원으로 여러 명창들이 동지(同知)·선달(先達)·생원(生員) 등의 벼슬을 하사 받았다.

대한제국 시절 협률사(協律司)와 원각사(圓覺社)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창극은 일제강점기 김창환(金昌煥)·이동백(李東伯)·송만갑(宋萬甲)·김창룡(金昌龍)·정정렬(丁貞烈) 등이 조직한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研究會)를 중심으로 판소리 다섯마당 외 사극(史劇)을 소재로 만든 창작 창극으로 발전됐다. 그러나 전통적 판소리는 겨우 명맥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광복 이후 국극(國劇)의 이름으로 창극활동은 지속됐으나, 판소리는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1960년대 이르러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로 지정됨으로써 판소리의 보존과 전승의 숨통을 열었다. 2000년대 이르러서는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지정됐다.

〈열두마당〉 열두마당은 송만재의 「관우희」와 정노식(鄭魯湜)의 『朝鮮唱劇史』에서 소개됐다. 서로가 약간 다르다. 「관우희」와 『朝鮮唱劇史』에서 일치하는 열마당은 장끼타령·변강쇠타령·배비장타령·심청가·흥부가·토끼타령·춘향전·화용도·강릉매화타령·옹고집타령이다.

「관우희」의 왈자타령(曰字打令)은 무숙(武叔)이타령으로, 그리고 「관우희」의 가짜신선타령은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으로 『朝鮮唱劇史』에 나오는 두마당이 서로 다르다. 이 열두마당 중 신재효는 여섯마당(심청가·흥부가·토끼타령·춘향전·화용도·변강쇠타령)만을 정리했고, 이선유(李善有)는 1933년 변강쇠타령을 제외한 다섯마당만을 정리하였다.

〈유파(流派)〉 판소리의 유파는 크게 넷으로 구분된다. 동편제(東便制)·서편제(西便制)·중고제(中高制)·강산제(江山制 또는 岡山制)가 그것이다.

〈조(調)와 장단〉 판소리음악은 고수의 북 반주로 연주하는 장단 및 창자가 노래 부르는 선율의 여러 조(調)로 구성된다. 판소리의 주요 장단은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엇모리·엇중모리·휘모리·단모리이다. 사람에 따라서 진양조를 느진진양·평진양·자진진양(세마치)로 세분하기도 한다. 다른 장단도 역시 세분되지만 빠르기만 다를 뿐이지 기본 북가락은 같다.

판소리 선율의 음악적 특징을 나타내는 조(調)로는 우조·평조·계면조·평계면조·경조(京調: 경드름)·추천목·설렁제·석화제·강산조·메나리조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많이 쓰이는 조는 계면조와 경드름이다. 판소리 사설의 극적 내용에 따라 이 조를 적절히 배합하여 음악적 변화를 준다.

조는 판소리의 가락에 쓰이는 음구성·가락형(선율형)·발성·악상 등의 표현방식에 따르는 특징으로 결정된다. 조는 사설의 극적인 내용에 따라서 다르게 쓰였다. 가령 비참(悲慘)하고 슬픈 장면의 노래는 계면조로 됐고, 비교적 느린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장단에 맞추어 불렸다.

평조나 우조는 화평(和平)하고 정대(正大)한 정경을 그리는 내용의 사설에 쓰였다. 추천목은 구수한 대목에, 그리고 설렁제는 씩씩한 내용의 사설에 각각 사용됐다. 판소리계에서 '이면(裏面)에 맞게 소리한다'는 말이 있듯이 판소리는 이야기의 상황에 적합하게 짜여진 장단과 조의 음악적 요소로 풍부하게 표현해 내는 높은 차원의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래 우리나라의 중요무형문화재로, 그리고 유네스코 지정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옛말에 '일고수이명창'(一鼓手二名唱)이라는 말의 뜻대로 고수의 중요성을 첫째로 꼽았지만, 판소리 공연의 주역은 창자가 이끌고 나간다. 가령 춘향가의 긴 이야기 속 인물과 여러 대목을 성공적으로 잘 이끌어 가기 위해서 판소리 창자는 변화무쌍한 목소리의 변화에 따른 여러 창법의 구사가 필수적이다. 목소리의 다양한 변화는 전통적인 창법(唱法)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예로부터 창법의 여러 용어가 사용됐다.

박헌봉(朴憲鳳)의 『唱樂大綱』에 나오는 전통적인 창법은 세 가지로 구분됐다. 첫째로 목에서 나는 성음(聲音)의 고저에 따른 평성(平聲)·상성(上聲)·중상성(重上聲)·최상성(最上聲)·하성(下聲)·중하성(重下聲)·최하성(最下聲), 이상 일곱 가지가 소개됐다.

둘째로 음색(音色)에 의한 목 성음의 창법은 통성(通聲)·철성(鐵聲)·수리성·세성(細聲: 살세성)·항성·비성·파성(破聲)·발발성·천구성·화성·귀곡성(鬼哭聲)·아귀성, 12가지로 됐다.

셋째로 목 성음의 변화에 따른 분류로는 생목·속목·겉목·푸는목·감는목·찍는목·떼는목·마는목·미는목·방울목·떡목·노랑목·마늘목·곧은목·끊는목·엮는목·다는목·깎는목·눅은목·된목·짜는목·찌른목·파는목·흩는목·넓은목·둥근목·짧은목·긴목·느린목·조으는목·너는목·줍는목·튀는목·뽑스린목·군목·엎는목·젖힌목, 37가지가 있다.

이러한 여러 종류에 따르는 창법은 이론적으로 체계를 갖추어 전승된 것이 아니라 구전심수(口傳心授)됐다. 실제로 소리를 배우는 과정에서 창자들이 스스로 체득하여 익힌 것들이다.

〈연구현황〉 판소리는 음악과 문학의 양면을 갖춘 특수한 공연예술이다. 그러므로 그동안의 판소리연구는 크게 문학적 연구와 음악적 연구로 구분된다. 문학적 연구가 음악적 연구보다 앞선다. 판소리가 소설(小說)에서 나왔다는 주장은 1933년 김태준(金台俊)의 『조선소설사』(朝鮮小說史)에 나온다. 1940년에 출간된 정노식(鄭魯湜)의 『朝鮮唱劇史』는 일제강점기 판소리명창의 구술을 바탕으로 엮은 명창열전(名唱列傳)이다.

해방 직후 판소리의 문학적 연구는 이병기(李秉岐)에 의해서 계속됐다. 1955년 음악적 연구가 이혜구(李惠求)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도됐다. 김동욱(金東旭)의 『춘향전연구』(1960)는 국문학계의 근원설화(根源說話)→판소리→소설의 학설을 확인한 연구성과이다. 1960년대 새로운 각도에서 시도된 판소리의 문학적 연구는 강한영(姜漢永)·김흥규(金興奎)·조동일(趙東一) 등에 의해서 시도됐다.

1960년 후반기부터 음악적 연구의 성과물이 이보형(李輔亨)에 의해서 발표됐다. "무가와 판소리와 산조에서 엇모리 가락 비교"(1969), "판소리 경드름에 관한 연구"(1971), "판소리 권삼득 설렁제"(1971), "메나리조"(1972), "판소리 염계달(廉啓達)의 추천목"(1973), "판소리 사설의 극적 상황에 따른 장단 조의 구성"(1973), "판소리 팔명창 음악론"(1974)은 이보형의 연구성과이다. 그 외 한만영(韓萬榮)의 "판소리의 우조"(1972) 및 이혜구의 "판소리의 음악적 특징"(1973)과 "판소리의 아니리"(1975)는 음악적 연구의 성과물이다.

〈기능보유자 및 전수자〉 1970년대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5호의 기능보유자 정권진(鄭權鎭)의 전수자는 조상현·조선화, 박초월(朴初月)의 전수자는 남해성·조통달, 박봉술(朴奉述)의 전수자는 박홍순·송순섭, 박동진(朴東鎭)의 전수자는 강정자·송정응, 김소희(金素姫)의 전수자는 김소연·안향란, 박녹주(朴綠珠)의 전수자는 한농선·박지희, 김여란(金如蘭)의 전수자는 조순희·박초선, 정광수(鄭珖秀)의 전수자는 정신양·정춘실이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6.2244~49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427~43쪽
  • 『文藝總鑑』, 서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6년, 270~73쪽
  • 『民俗藝術事典』, 서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9년, 263~66쪽

참조어

동편제 , 서편제 , 중고제 , 강산제 , 연창(演唱), 열두마당, 농악십이차(農樂十二次) , 창극가(唱劇歌), 창조(唱調), 극창(劇唱), 남도소리, 남도창(南道唱), 민속음악(民俗音樂), 민요(民謠) , 농악(農樂) , 무악(巫樂) , 범패(梵唄) , 산조(散調) , 시나위 , 민간음악(民間音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