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만순

박만순

[ 朴萬順 ]

요약 성악가(판소리). 철종(1849~1863)·고종(1863~1907) 때 동편제(東便制) 명창. 전라북도 고부군(古阜郡: 현 정읍시 고부면) 수금리(水金里) 출생. 송흥록(宋興祿)의 직계문인(直系門人).

의 수령(首領)인 박만순은 전라북도 운봉(雲峰)과 경상도 안의(安義)에서 거주하면서 활동하다가 향년(享年)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 제자로 를 잘 불러 대원군(大院君)의 총애를 받은 그의 은 춘향가 중 "몽유가"(夢遊歌)에 전한다. 한때 (朱德基)의 지도를 받다가 후에 송흥록의 문하에 들어가 10년 동안 수련하면서 임실군(任實郡)의 어느 폭포(瀑布) 아래서 을 연마하고 일가를 이루었다.

송흥록의 문하에서 특히 춘향가 중 ""를 적공(積工)한 후 출세의 제1착으로 박만순은 전주의 선화당(宣化堂)에서 제1성을 발휘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양성(陽聲)으로 맑고 밝은 성음이며, 소리는 (羽調)를 주로 하여 짧고 진중하고 정대한 소리를 했다고 한다. 진중한 아래 음역뿐만 아니라 매우 높은 음역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과 같은 것이 뛰어나 듣는 이로 하여금 심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듯 기예가 탁출했지만, 오만하고 자만했던 박만순은 자기 스스로 흥미가 나지 않으면 태장(笞杖)을 죽도록 맞아 가면서도 권세의 위력에 불복하는 곧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 번은 대원군(大院君)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는 길에 충청감사 조병식(趙秉植)의 청을 받고서 "대원군께서 소리를 봉(封)하여 가지고 오라고 하셨으니 소리를 뗄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대원군이 총애하여 중년에 무과(武科) 선달(先達)의 직계(職階)를 제수(除授) 받은 그의 장기로는 춘향가 중 ""와 "옥중가"(獄中歌), 그리고 중 "화용도"(華容道)가 있고, 그의 더늠은 옥중가 중 "몽유가"(夢遊歌)이다. ··이 방창(倣唱)한 "몽유가"는 정노식(鄭魯湜)의 『朝鮮唱劇史』에 전한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338~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