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만갑

송만갑

[ 宋萬甲 ]

요약 성악가(판소리). 판소리명창. 조선음률협회(朝鮮音律協會)의 부회장·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研究會) 이사. 전라남도 순천군(順天郡) 낙안(樂安) 또는 전라북도 구례군(求禮郡) 봉북리(鳳北里) 출생. 송우룡(宋雨龍)의 사자(嗣子: 맏아들). 송흥록(宋興祿)의 종손(宗孫).
출생 - 사망 1865년 ~ 1939년
송만갑

7세 때 소리공부를 시작하여 13세 때 아이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통상성(通上聲)으로 둥글고 밝은 목소리는 독보적이었던 어전(御前)에서 누차 소리를 하여 감찰직(監察職)까지 받았다. 어려서 부친의 지도 아래 노래 공부를 시작한 송만갑의 창조(唱調)는 가문의 전통적 법제를 계승한 것이 아니었다. 시대적 요구에 순응하기 위해 통속화하는 경향을 보였으므로, 송씨 가문의 법통을 말살하는 패려자손(悖戾子孫)이라 해서 쫓아내려고 하였다. 송만갑은 말하기를, "창극가(唱劇家)는 주단포목상(紬緞布木商)과 같아서 비단을 달라는 이에게는 비단을 주고 무명을 달라는 이에게는 무명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융희황제(隆熙皇帝)께서 (圓覺社)를 서대문 안에 설치하고 현대적 (唱劇)을 구성하여 대규모로 연행하였을 때, 그는 김창환(金昌煥)과 함께 간부로 활동하였다. 전라감사 이재각(李載覺)으로부터 참봉직(參奉職)을 받은 송만갑은 원각사 시절 어전(御殿)에서 소리하여 감찰직을 제수(除授) 받았다. 원각사가 해산되자 궁내부(宮內府) 별순검(別巡檢)의 실직(實職)을 거행하다 3개월 후에 해임된 그는 그 후에 제자교육에 힘쓰면서 만년에 ·과 함께 함께 에서 성악 발전에 여생을 바쳤다.

송만갑의 문도 중에는 ·김광순·와 같은 쟁쟁한 명창이 있다. ··흥부가· 중 화용도(華容道) 장면을 가장 잘 부른 그는 둥글고 맑은 통상성(通上聲)으로 내질러 떨어뜨리는 성조(聲調)의 소유자였다. 춘향가·심청가··적벽가에 뛰어난 그의 장기는 적벽가(赤壁歌)의 "화용도"(華容道)이고, 그의 은 춘향가 중 ""(農夫歌)라고 『朝鮮唱劇史』에 전한다.

1909년 원각사의 폐지 이후 그가 조직한 송만갑협률사(宋萬甲協律社)라는 유랑창극단에서 이동백···· 등의 단원과 함께 주로 지방에서 공연활동을 전개하다가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들은 후 경남 통영(統營)공연을 끝으로 해산하였다. 대한제국(1897~1910) 시절 원각사에서 김창환··이동백 등을 비롯해 ··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13년 3월 (長安社)에서 흥행하는 구연극(舊演劇)에 출연했고, 1920년 6월 구례(求禮) 장터에서 흥행하는 오협률사에서 로 출연했으며, 1926년 11월 6일 조선음악무용회 때 출연하였다. 1926년 11월 21일 명창대회 때 출연했고, 1927년 2월 17~20일 조선고가무회(朝鮮古歌舞會) 주최 조선명창대회 때 출연하였다.

1927년 3월 5일 (京城放送局)에 처음 출연하여 춘향가를 방송한 이후 1938년 8월 3일까지 13회 방송했다. 그 외 흥보가(14회)·(12회)·심청가(7회)·적벽가(4회)를 포함하여 모두 50여 회 방송국에 출연했다. 각 판소리의 곧 토막가락, 예컨대 춘향가의 경우 "광한루경개"(廣寒樓景槪)·"박석틔"·"신관사또도임"·"어사출도"(御使出道)·"" 같은 눈대목을 방송하였다. 판소리 다섯마당 외 "천하태평"(天下泰平)·""(皐皐天邊)·""을 포함한 13곡의 를 방송하였다.

1930년 9월 27일 창립 때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다. 1931년 3월 30~31일 조선음률협회의 제2회 공연이 열렸을 때 출연해 단가 ""을 공연하였다. 1931년 7월 1일 명창대회 때 출연했고, 1932년 7월 8일 경성음률협회(京城音律協會) 주최 전조선명창대회 때 출연하였다. 1933년 10월 13~14일 조선음률명창대회 때 출연했다. 1934년 5월 11일 그는 이동백·· 등의 발기인과 함께 1934년 4월 24일에 설립한 조선성악원(朝鮮聲樂院)을 조선성악연구회로 개칭하여 다시 출범시켰다.

1934년 5월 11일 조선음악연구회의 발기총회 때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34년 5월 30일~6월 1일 조선명창대회 때, 1934년 9월 5일 김초향독연회 때, 1935년 11월 27~28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로 추동명창대회 때, 1936년 8월 28~29일 수해구제구악대회 때, 1938년 1월 11일 김석구독창회 때, 1938년 4월 28일 판소리대회의 전창(全唱) 때, 그리고 1938년 5월 4~10일 전조선향토연예대회 중 조선성악연구회의 판소리대회 때 출연하였다.

1937년 1월 3일 "명창에게 들은 생사"라는 제목 아래 송만갑·이동백·김창룡·정정렬, 이상 네 명창의 대담록(對談錄)이 게재됐다. 1938년 5월 23일 조선성악연구회의 제5회 정기총회가 열렸을 때 이사로 선출됐다. 조선성악연구회의 에서 이동백·정정렬·한성준 등과 함께 1936년 2월 9~11일 가극 공연 때, 6월 8~11일 연쇄창극(連鎖唱劇) 유충렬전 공연 때, 9월 15~16일, 25일 가극 공연 때, 10월 28일 가극 공연 때, 1937년 2월 26~3월 2일 가극 (淑英娘子傳)의 공연 때, 3월 3일 가극 배비장전 때, 6월 21~25일 가극 공연 때, 1938년 8월 8일 창극 (雍固執傳) 때, 10월 4~5일 새 창극 농촌야화(農村夜話) 공연 때 출연하였다.

만년에 제자육성에 힘썼고, 문하생으로 김정문·박녹주·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 그가 취입한 "공축가"(工祝歌)·"놀보연구가"(imagefont甫燕謳歌)·"농부가"를 포함한 와 판소리 많은 눈대목은 일축(日蓄)조선소리반에, 그리고 그가 취입한 "농부가"·단가 "고고천변"·"진국명산"을 비롯한 여러 노래는 일축제비표 조선레코드에 전한다.

일제강점기 그가 취입한 ""·"진국명산"·"" 등은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하고, 한성준의 장구반주로 취입한 "가자 어서 가"·"고고천변"·단가 "역려과객"(逆旅過客) 등은 일본 빅타음반에 전한다. 일제강점기 그가 취입한 "농부가"·"박타령"·"" 등 여러 대목의 노래는 『조선레코드총목록』에 전한다. 일제강점기 그가 취입한 음반회사는 일축(日蓄)회사(38매)·일동(日東)회사(7매)·콜럼비아사(3매)·빅타사(4매), 이상 네 회사였고, 취입한 음반매수는 총 52매였다.

일축회사에서는 수궁가·심청가·적벽가·춘향가·흥보가 다섯마당을 모두 취입했고, 콜럼비아사는 수궁가·춘향가·흥보가를 취입했다. 빅타사는 수궁가와 춘향가를 취입했고, 일동회사는 심청가와 춘향가만을 취입하였다. 단가 "진국명산"(鎭國名山)을 잘 불렀고, 특장은 흥보가 중 박타는 대목이었다. 73세를 일기로 서울 왕십리에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458~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