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

김창룡

[ 金昌龍 ]

요약 성악가(판소리). 판소리명창. 충남 서천(舒川) 횡산리(橫山里) 또는 전라도 출생. 김성옥(金成玉)의 손자. 김정근(金定根)의 아들.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研究會) 조사부 이사(調査部理事).
출생 - 사망 1872년 ~ 1943 (또는 1935)년
김창룡

전라도에서 출생하고 충남 서천에서 자랐다.

어려서 부친 에게서 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13세 이후에는 (李捺致)의 문하에서 1년간 지침을 받고 비로소 소리를 터득했다. 그 후 홀로 연마하다가 선배인 김창환· 등을 만나 견문을 넓혔다.

32세 때 상경하여 (演興社) 창립에 큰 몫을 했고, (圓覺社) 시절 김창환··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09년 원각사의 폐지 이후 송만갑 이 조직한 송만갑협률사(宋萬甲協律社)라는 사설 유랑창극단에서 이동백··· 등의 단원과 함께 주로 지방에서 공연활동을 전개하다가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들은 후 경남 통영(統營)공연을 끝으로 해산하였다. 1914년 5월과 6월 (團成社)의 (舊劇) 공연 때 판소리 및 로 출연하였다.

1915년에 설립된 (京城舊派俳優組合)의 평의원. 그는 조합장은 강경수, 부조합장은 와 , 총무는 과 , 회계는 , 선생은 김창환·이동백·, 사무는 윤병두, 평의원은 곽천희·김기봉· 등, 여배우는 ·· 등, 이상 총 29명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6년 11월 11일 (京城放送局)에 처음으로 출연하여 를 방송한 이래로 1942년 4월 24일까지 (26회)·(13회)·적벽가(15회)·춘향가(20회)·(3회)·(44회), 이상 총 123회나 방송국에 출연했다. 그가 방송한 단가는 "대장부"(大丈夫)·"만고영웅"(萬古英雄)·""(楚漢歌)를 포함해 모두 일곱 곡목이다. 1930~1942년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한성준 등과 함께 "광한루가"(廣寒樓歌)를 비롯한 판소리의 여러 을 방송하였다.

1930년 9월 15일 때 출연했으며, 1930년 9월 27일 (朝鮮音律協會)가 창립됐을 때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다. 1931년 3월 30~31일 조선음률협회의 제2회 공연이 열렸을 때 단가 "초한가"를 공연했고, 1931년 5월 11일 호성극단 창립 1주년기념 공연 때 출연했으며, 1931년 5월 3~7일 조선명창대회 때 출연하였다.

1934년 5월 11일 조선음악연구회의 발기총회 때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1935년 11월 27~28일 주최 추동명창대회 때 출연했으며, 1936년 2월 9~11일 조선성악연구회의 가극(歌劇) "배비장전" 공연 때, 그는 송만갑·이동백· 등과 함께 출연했다고 조선일보 1936년 2월 8일자에 전한다.

1936년 8월 28~29일 수해구제구악대회 때, 1936년 9월 12일, 15~16일, 25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 가극 "춘향전" 공연 때, 1936년 12월 15~20일 가극 "심청전" 공연 때, 1937년 2월 26~3월 2일 가극 "숙영낭자전"(淑英娘子傳)의 공연 때, 1937년 6월 21~25일 가극 "편시춘"(片時春) 공연 때, 1938년 1월 11일 김석구독창회 때, 1938년 4월 27~28일, 5월 4~10일 전조선향토연예대회 중 판소리대회의 춘향전과 심청전 공연 때, 1938년 8월 8일 창극 "옹고집전"(雍固執傳) 때, 1939년 1월 29일 조선성악연구회 주최 창극 "춘향전" 때, 1940년 3월 16~17일 한해구제명창대회 때 출연하였다.

1937년 1월 3일 "명창에게 들은 생사"라는 제목 아래 송만갑·이동백·김창룡·정정렬, 이상 네 명창의 대담록(對談錄)이 게재됐다. 1937년 5월 20일 조선성악연구회의 제4회 정기총회 때 이사장으로 선출됐고, 1938년 5월 23일 조선성악연구회 제5회 정기총회 때 이사로 선임되었다. 1939년 5월 13~14일 조선소리경창대회 때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다. 1939년 5월 22일 조선성악연구회 제6회 정기총회 때 이사로 선임되었다. 장기는 적벽가 중 ""(三顧草廬)와 심청가 중 꽃타령을 잘 불렀다. 심청가와 적벽가에 뛰어난 그의 장기는 심청가의 "꽃타령"이고, 그의 은 적벽가의 "삼고초려"라고 『朝鮮唱劇史』에 전한다.

일제강점기 여러 회사에서 취입한 음반은 일축음반(15매)·일동음반(10매)·콜럼비아음반(25매)·폴리돌음반(61매), 총 109매이다. (토끼타령)·적벽가(화용도)·심청가·춘향가·흥보가 이렇게 다섯마당 모두가 취입되었다.

그가 부른 "곽씨부인 고용가"(雇用歌)를 포함한 심청가의 여러 눈대목과 적벽가·흥보가는 일축(日蓄)조선소리반에, 그리고 그가 취입한 적벽가(""·"자룡이 맛나는데"), 춘향전("광한루 나가는데" 등 여러 눈대목), "놀보 제비가"·"톡기(토끼)타령" 및 단가 "쥭장(竹杖) 집고" 등 여러 곡은 일축 제비표 조선레코드에 전한다. 한성준의 장구반주로 취입한 (鬼哭聲)의 ""(泛彼中流) 등 여러 곡은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하고, 그가 취입한 창극 심청전전집·화용도전집은 폴리돌음반에 전한다. 그가 취입한 "곽씨부인 유언(遺言)" 등의 곡명은 『조선레코드총목록』에 전한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237~38쪽